[이광준의 V-포커스] 프로배구팀이 외국인선수 없이 살아가는 법
- 남자프로배구 / 이광준 / 2019-11-04 13:40:00
[더스파이크=이광준 기자]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그리고 OK저축은행. 최근 외국인선수 없이 V-리그에서 선전하고 있는 팀이다.
V-리그 남자부 각 팀에서 외국인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매 경기 공격에서 최소 30~40% 정도는 외국인선수들이 맡는다. 매 시즌 득점 상위권엔 외국인선수들 이름으로 줄이 서 있다.
올 시즌 초반은 양상은 조금 다르다. 특정 팀을 제외하면 각 팀 외국인선수들이 좀처럼 활약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부상이나 적응 문제 때문에 아예 코트 위에 외국인선수가 못 나오는 경우도 있다.
현대캐피탈과 OK저축은행은 팀 외인이 부상으로 빠졌다. 현대캐피탈 에르난데스는 발목 골절상을 당했다. 대체 외인을 찾을 때까진 계속 외인 없이 국내 선수들로만 치러야 한다. OK저축은행 레오는 종아리 족저근 손상 부상이다. 최대 3주 진단을 받았다. OK저축은행은 다친 레오의 회복을 기다린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역시나 국내파로 라인업을 채운다.
삼성화재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외인 산탄젤로는 시즌 개막 전 발목부상을 당했다. 대체 선수로 들어와 팀 합류가 늦은 상황에서 부상까지 당해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포짓 스파이커 자리에 박철우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어 출전할 틈이 없다. 지난 몇 경기 동안 산탄젤로는 줄곧 웜업존에서만 머물렀다.

외인 없어도 탄탄한 세 팀의 경기력
사실상 삼성화재는 시즌 시작부터 외국인선수 없이 경기에 나서고 있다. 박철우와 산탄젤로 포지션이 겹치는 게 문제였다. 신진식 삼성화재 감독은 시즌 초반 박철우와 산탄젤로 공존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구상했다. 박철우를 미들블로커로 놓고 산탄젤로가 아포짓 스파이커로 들어가는 방법. 혹은 박철우가 그래도 아포짓 스파이커로 뛰고 산탄젤로가 윙스파이커 한 자리에 나서는 것이었다.
결론은 산탄젤로가 빠지는 쪽으로 모아졌다. 박철우 폼이 워낙 좋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V-리그 어떤 선수, 심지어 외국인선수와 비교해도 이만한 공격력을 가진 선수는 없다. 30대 중반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빼어났다. 둘째로는 산탄젤로의 경기력이다. 훈련 부족으로 팀에 완벽히 녹아들지 못한 산탄젤로다. 그가 투입될 경우 팀 밸런스가 무너졌다. 박철우를 대신해 아포짓 스파이커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리시브가 필요한 윙스파이커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신진식 감독도 이를 인정했다. 신 감독은 “산탄젤로를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이 체제가 최상이다”라며 “산탄젤로는 백업으로 대기하면서 향후 박철우가 체력적으로 힘들 때 투입하는 방향으로 하겠다”라고 말했다.
현대캐피탈과 OK저축은행은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예상에 없던 선수운영을 하고 있다. 현대캐피탈은 에르난데스가 빠진 윙스파이커 자리에 박주형, 이시우가 주로 나서고 있다. 초반에는 에르난데스 공백에 크게 삐걱댔다. 그렇지만 갈수록 안정을 찾고 있다. 전광인이 공격 쪽에서 비중을 늘렸다. 시즌 초 다소 잠잠하던 문성민도 점점 경기력을 끌어올려갔다. 에르난데스가 차지하던 비중을 여러 포지션이 고루 분담하면서 안정감이 상승했다.
OK저축은행은 아포짓 스파이커 자리에 조재성이 레오 대신 자리잡았다. 그는 지난 2일 한국전력과 경기에서 28득점, 공격성공률 77.78%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팀을 이끌었다. 블로킹 3개, 서브에이스 4개, 후위 9개로 트리플크라운 달성에도 성공했다. 개인 2호 기록이었다. 레오가 빠진 기간 동안 조재성의 활약을 기대하게끔 했다.

외국인선수 부재가 낳은 순기능
외인 없이도 ‘재밌는 배구’가 가능했다
외국인선수 자리에 국내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생긴 변화는 꽤나 다양하다. 우선 이전에 조명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삼성화재에서는 김나운, 고준용 등이 공격에서 빛을 냈다. 현대캐피탈에선 그간 원 포인트 서버로 주로 나섰던 이시우가 기회를 받고 있다.
외국인선수가 빠지게 되면 팀 수비조직력 면에서는 오히려 플러스가 되기도 한다. 수비까지 좋은 외국인선수는 드물다. 상대적으로 국내 선수들이 그 부분은 낫다. 석진욱 OK저축은행 감독은 “레오가 빠진 자리에 조재성이 들어가면서 수비는 더 좋아졌다. 아무래도 레오보단 조재성이 수비는 낫다”라고 이야기했다.
외국인선수가 없다는 건 곧 ‘에이스 공격수’ 하나가 빠진 셈. 이는 코트 위 선수들의 정신력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수비에서 하나라도 더 건져내기 위해 집중하고, 공격에 조금이라도 더 가담해서 힘을 보태려고 나선다. 무엇보다 ‘누군가 하나 빠졌으니 더 뭉쳐야 한다’라는 식으로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이미 여러 선수들이 “외국인선수가 빠진 만큼 더 책임감을 갖고 뛰게 됐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세 팀 모두 외국인선수 없이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걱정을 샀던 삼성화재는 1라운드를 3승 3패로 마쳐 기대 이상 성적을 보였다. 개막 이후 2연패에 빠졌던 현대캐피탈은 에르난데스 부상 이후 2승(1패)을 달성해 분위기 반전 계기를 마련했다. 레오 부상 전부터 잘 나가던 OK저축은행은 여전히 잘 나간다. 개막 이후 무패 행진을 계속 이어갔다.

외국인선수가 빠진 위기를 국내 선수들로 채워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니, 팬들 입장에선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기존에 보이지 않던 스타들이 뛰는 모습도 보고, 색다른 배구를 보는 맛이 있다.
특히 지난 1일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의 V-클래식 매치는 그 ‘정수’를 제대로 보여줬다. 양쪽 코트 위에 온통 국내 선수들만 뛰는 광경은 색다름이었다. 서로 치고받는 경기내용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매 세트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쳐 두 팀 모두 박수를 받았다.
배구를 이루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가장 화려하고, 주목을 받는 건 그 무엇보다 ‘득점’이다. 화끈한 공격력이야말로 팬들을 사로잡는 1번 매력이다. 그 중심에는 늘 외국인선수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 시즌 이 세 팀이 보여주는 행보는 색다르다. 외국인선수를 대체해 나선 선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그 외에 국내 선수들 공격비중이 올라가면서 다양한 플레이가 등장하고 있다. 프로리그에서 선수 국적이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국내 선수들이 잘 해내는 모습은 여러 배구팬들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다.
추후에 외국인선수가 다시 팀에 합류하더라도 국내 선수들이 주도적으로 경기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면, 팬들에게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사진_더스파이크 DB(문복주,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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