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태양보다는 달이 되기를 자처한 남자 유광우
- 남자프로배구 / 김종건 / 2022-08-29 10:03:40
2022 순천 KOVO컵 남자부가 대한항공의 통산 5번째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6년 사이 코로나19로 열리지 못했던 2019~2020시즌을 제외하고 5차례의 챔피언결정전에 연속 진출했던 대한항공은 탄탄한 전력을 자랑하며 우승컵을 차지했다. 여자부 통산 5번 우승의 GS 칼텍스와 함께 대한항공도 팀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퍼즐(윙 스파이커 정한용, 미들블로커 김민재)을 찾아내며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의 가능성까지 확인한 우승이라 기쁨이 더 클 것 같다.
특히 발리볼 챌린지컵과 AVC컵대회에서 남자 대표팀의 주 공격수로 활약했던 임동혁은 일취월장(日就月將)의 기량을 과시했다. 국제 대회에서 높은 블로킹을 상대하고 온 임동혁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공격에 여유가 생긴 덕분에 힘을 쓸 때와 뺄 때를 알았다. 클러치 상황에서는 어떻게 든 해결했다. 왜 젊은 선수들의 국제 대회 경험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잘 보여줬다. 2세트 24-23에서의 공격 성공은 결승전 승패의 분수령이었다. 덕분에 31표의 기자단 투표 가운데 27표를 얻어 대회 MVP가 됐다.
비록 28일 한국전력과의 결승전에서 임동혁, 정지석 등 공격수의 화려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한항공의 숨은 MVP는 따로 있었다. 베테랑 유광우였다. 37세의 세터는 조별 예선 3경기 포함 5경기에서 팀을 지휘하며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삼성화재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 포함 사흘 연속 벌어지는 경기 일정은 가뜩이나 발목이 좋지 못한 유광우에게는 가혹한 상황이었지만 이겨냈다. 그는 “발이 무거워 힘들었지만 어떻게 든 이겨냈다”고 했다.
유광우는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이 추구하는 스마트하고 빠른 배구에 특화된 세터라는 것을 여러 차례 보여줬다. B퀵과 C퀵 사이의 빠르고 정확한 패스로 2명의 공격수를 이용하는 유광우의 패스에 한국전력의 블로커들은 쉽게 따라오지 못했다. 덕분에 공격수와의 1-1 상황이 자주 만들어졌다. 간간이 섞는 속공은 중앙 공격수들의 입맛에 딱 맞았다. 한국전력이 자랑하는 높은 블로킹은 유광우의 빠른 패스에 자주 허물어졌다. 결승전에서 대한항공은 공격 성공률 54.41%-42.68%로 크게 앞섰다. 블로킹에서 16-6으로 큰 차이가 난 것도 두 팀 세터의 역량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다. 명 세터 출신인 권영민 한국전력 감독이 결승전 뒤 인터뷰에서 “세터 보강”을 언급했던 이유와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한 이유다.
2019~2020시즌을 앞두고 유광우가 대한항공으로 이적했을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측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삼성화재 시절 7연속 우승의 주역으로 지내던 그는 보호 선수 명단에서 빠지는 바람에 우리카드로 이적했다. 마음을 다잡고 인천으로 이사까지 했던 우리카드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8~2019시즌이 끝난 뒤 그의 입지는 초라해졌다. 몇몇 팀에서 탐을 냈지만 영입했을 때의 좋은 점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했다. 선수로서의 기량이 끝났다고 보는 팀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항공은 용감하게 접근했다.
황승빈의 입대로 한선수를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대한항공이었다. 코치진으로부터 의견을 종합한 뒤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미 한선수라는 주전 세터를 가진 대한항공이 동갑내기이자 라이벌 세터를 영입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다가올 일들이 궁금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다’는 말들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유광우는 참으로 현명하게 행동했다.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자마자 자신을 낮췄다. 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한선수의 존재를 인정했다. 자신은 보조 역할에 만족한다고 했다. 태양이 아니라 스스로 달이 되기를 자처하는 유광우 덕분에 팀 내의 서열 정리가 쉽게 끝났다. 내부 교통 정리가 깔끔해진 대한항공의 케미스트리는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 두 베테랑은 서로를 존중해가며 각자가 잘하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팀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선수가 간혹 부침을 겪을 때면 유광우가 게임 체인저로 경기를 구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순천 KOVO컵을 앞두고 한선수는 국가 대표팀에서 돌아왔다. 발리볼 챌린지컵과 AVC컵까지 참가한 뒤였다. 아픈 무릎을 참아가며 대표팀을 위해 봉사하고 온 37세의 베테랑은 14명의 출전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그동안 선수들과 준비해온 유광우를 믿었다. 그 판단 덕분에 한선수는 충분한 휴식을 하며 시즌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유광우는 15살이나 어린 프로 2년 차 정지혁과 함께 순천 KOVO컵을 끝까지 책임졌다. 팀이 치른 5경기에서 16세트에 출전해 268개의 세트를 시도했고 155개를 성공시켰다. 이미 9개의 시즌 우승 반지를 가진 유광우는 왜 그토록 많은 우승을 차지한 세터인지를 대회 내내 확인시켰다.
유광우 영입 이후 대한항공은 2차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두 이겼다. 2명의 믿음직한 세터를 둔 팀이기에 긴박한 상황에서도 공격수들은 안심하고 공을 때리고 있다. 세터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있기에 지금의 대한항공을 상대 팀들은 어려워한다. V리그 최고의 공격능력을 보유한 팀이 된 이유다. 이유성 단장, 박진성 사무국장 체제였던 3년 전의 그 탁월했던 판단이 만든 결과다.
두 베테랑 세터의 동행을 두고 누군가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했다. 잇몸과 치아가 되어서 서로를 도와주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 관계. 지금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경쟁을 떠나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됐다. 순천 KOVO컵은 “먼 길을 갈수록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했다. 이제 태양과 달은 트레블을 향해 함께 달린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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