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신뢰와 만만디는 KB손해보험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남자프로배구 / 김종건 / 2022-11-07 0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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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연승의 비밀, 자신의 판단과 동료를 믿는 황택의, 감독이 신뢰에 보답하는 니콜라


2021~2022시즌 남자부 챔피언결정전은 V-리그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멋진 경기였다.

챔피언이 탄생하는 최종 3차전이 엎치락뒤치락하며 5세트까지 이어지고 긴 듀스 공방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무려 2시간57분 동안 벌어진 경기는 V리그 역대 최장시간경기 기록을 세웠다. 이 부문 2위와 무려 19분 차이다. 앞으로도 오래 이 기록은 유지될 전망이다.

 

이탈리아 리그행을 앞둔 외국인 선수 케이타가 최종 3차전에서 무려 57득점을 기록하며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승자는 대한항공이었다. 5세트 12-9의 리드를 지켜내지 못하고 무려 5번의 챔피언 확정 포인트를 놓친 KB손해보험에게는 두고두고 그 순간들이 기억날 것이다. ‘우승은 결코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대목이다.

 

패배가 눈앞인 긴박한 상황에서 대한항공의 선수들은 더 절박했고 승리를 향한 열정이 더 강했다. 그런 면에서 지옥의 문턱에서 스스로 헤쳐나온 대한항공 선수들의 담대함과 승리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 물론 아쉽게 기회를 놓친 KB손해보험 선수들도 쓰라린 패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내 기량과 판단의 신뢰, 동료들을 향한 신뢰를 모두가 실감했을 것이다.

 


2022~2023시즌을 앞두고 KB손해보험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V리그에서 2시즌을 뛰면서 역대 최고의 용병으로 자리매김한 케이타는 이탈리아리그 베로나로 이적했다. 그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기에 어떤 외국인 선수가 오더라도 케이타의 그늘에 가릴 것이라고 봤다. 대한항공과의 새 시즌 개막전에서 니콜라 멜라냑이 20득점(36.59% 공격성공률), 2블로킹, 3서브에이스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단양에서 벌어졌던 프리시즌 6개 구단의 친선경기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니콜라였다. 구단 관계자조차 솔직히 걱정스러웠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여기저기 부족한 점이 보였다.

 

하지만 한국전력과의 시즌 2번째 경기 때부터 KB손해보험과 니콜라는 대반전을 보여줬다. 최근 팀의 3연승 동안 니콜라의 기록은 급상승이다. 1027일 한국전력을 시작으로 30OK금융그룹, 113일 우리카드까지 각각 33득점, 49득점, 32득점을 기록했다. 더 놀라운 것은 공격성공률이다. 각각 58%~62.69%~77.78%를 찍었다. 무엇보다 팀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기막힌 플레이로 게임 체인저의 역할을 해줬다. 단순한 숫자 이상을 보여준 것이다. 니콜라가 중요한 순간마다 앞서서 팀을 이끌어주자 주변의 평가도 180도 달라졌다.

 

 

니콜라가 많은 득점을 기록했지만, 더 근본적인 변화는 황택의의 패스에 있다. 최근 3연승 동안 그의 연결과 판단에 상대 팀 미들블로커는 쉽게 허물어졌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미들블로커로 평가받은 한국전력 신영석마저도 황택의의 연결과는 반대 방향으로 자주 움직이며 니콜라에게 쉬운 공격 기회를 줬다. 인상적이었다. 황택의에게 지난 시즌과 패스가 달라진 이유를 묻자 신뢰를 먼저 말했다. “지난해까지는 동료에게 하나 줘서 득점이 나지 않으면 케이타에게 주는 배구를 했는데 올해는 내 판단과 동료들의 기량을 믿고 올린다고 했다. 그는 동료들이 리시브를 안정적으로 해주면서 내게 오는 공이 편해진 덕분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자신의 패스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하며 진정한 팀의 리더로 거듭나는 황택의는 우리카드와의 3세트 때 22-24로 뒤진 상황에서 김홍정에게 속공을 연결하며 경기의 흐름을 바꿔버렸고 결국 4연속 득점으로 경기를 끝냈다. 그는 리시브가 안정됐고, 여유가 생기다 보니까 그런 플레이가 나온다. 예전에는 변화를 주려고 했을 때 리듬이 없었는데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 있게 하고 동료를 믿다 보니까 통한다. 코트 안에선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시즌 뒤 군에 입대하기로 마음을 정해서인지 황택의는 이번 시즌 배구와 동료를 대하는 자세들이 많이 달라졌다. 구단 관계자는 인간적으로도 한결 성숙해졌다고 했다.

 


KB손해보험의 또 다른 신뢰는 후인정 감독에게서 나왔다. 구단은 지난 시즌 뒤 감독과의 계약기간을 연장하며 지난 시즌의 성공을 이어주길 기대했다. 후 감독은 매사에 서두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만만디다. 많은 이들이 니콜라의 기량을 의심하며 걱정할 때도 지금 저 친구보다 더 좋은 선수는 없다고 했다.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대한항공과의 개막전 뒤 눈치를 보던 니콜라를 불러서 너를 교체할 생각이 없다. 시즌 끝까지 함께 할 생각이니까 마음 편하게 해라며 먼저 신뢰를 보여줬다. 니콜라는 감독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더욱 믿음이 생겼다. 팀과 동료, 감독, 내 기량을 믿고 편하게 하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후인정 감독은 경기 때 선수들을 다그치지도 훈련을 독하게 시키지도 않는다. 만만디 배구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실점이 나오면 상대가 잘한 것이야라며 간단하게 정리하고 다음 랠리에 더 집중하라고 선수들에게 지시한다. 이런 감독을 믿다 보니 리베로 정민수는 우리카드와의 경기 때 안 되면 (실점을) 그냥 먹으면 돼라며 리시브에 큰 부담을 느끼는 동료들을 격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다수의 감독이 승리를 위해 선수를 쥐어짜려 하지만 후 감독은 다른 생각이다. “어차피 프로선수가 된 이상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해서 기량이 크게 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선수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기량이 무엇인지 알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힘든 훈련보다는 경기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컨디션을 적절히 조절해주려고 한다고 했다. 이 또한 선수들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자 가면 빨리는 갈 수 있지만 멀리 갈 수는 없다. 긴 시즌을 항해하기 위해서는 여럿이 함께 마음을 맞추고 움직여야 한다. 이럴 때 서로를 움직이게 만드는 최고의 힘은 신뢰다. 지도자와 동료를 믿고 지금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믿음이 코트 안의 6명이 공유할 때 그 팀은 하나가 된다. 이기는 팀에게는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것이 스포츠 불변의 법칙이다. 3연승의 KB손해보험에게는 지금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인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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