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기업은행 김호철 감독과 천신통의 ‘세터학개론’

매거진 / 이보미 / 2025-01-02 11: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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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세터 출신’ IBK기업은행 김호철 감독과 중국에서 온 세터 천신통이 만났다. 현역 시절 한국에서는 물론 이탈리아에서 최고 세터로 인정을 받았던 김 감독, 새로운 배움을 얻고자 첫 해외 진출에 나선 천신통. ‘아버지와 딸’과 같은 티키타카 케미스트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으면서 코트 위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세터 출신의 사령탑과 외국인 세터
서로의 강렬했던 첫 만남

IBK기업은행은 작년부터 시행된 아시아쿼터에서 2년 연속 세터 자원을 선발했다. 지난 시즌에는 태국 국가대표 세터인 폰푼 게드파르드와 함께 했다. 올해는 중국 국적의 천신통의 손을 잡았다. 제주도에서 열린 아시아쿼터 트라이아웃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 지명권을 얻고 천신통을 영입했다. ‘컴퓨터 세터’라고도 불린 김호철 감독의 지휘 하에 팀에 녹아들고 있는 천신통이다.

제주도에서의 첫 인상은 어땠나.
김호철
제주도에서 보고 우리 코칭스태프 모두 ‘오! 괜찮다!’라고 했다. 제주도에 가서 보는 순간 토스가 그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정확한 토스를 보여줬다. 우리 선수들과도 맞춰갈 수 있는, 팀에 어울리는 세터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세터가 필요했기 때문에 무조건 신통을 뽑겠다고 생각했다.
천신통 트라이아웃 현장에 가기 전에도 한국 리그 영상을 봤었다. 팀에 대해 자세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선발되고 나서 에이전시 쪽에서 김호철 감독님 얘기를 해주셨다. 세터로서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천신통 선수는 첫 해외 진출로 인한 부담감이 없었나.
한국 리그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선발됐을 때는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이나 압박감이 컸다.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현재 중국에서 배구 지도자를 맡고 있는 아버지는 어떤 조언을 해주셨나.
신통
내가 한국 팀에 뽑혔을 때 엄청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마음가짐을 편하게 하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 마음이 평온해야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감독님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
(호철 아버지가 감독님 말 잘 들으라는 말은 안 했어? 신통 그것도 맞다.)
신통 아버지는 늘 배구 쪽에서 큰 도움을 주신다. 배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배구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현재 함께 하고 있는 김호철 감독은 어떤 분인 것 같나.
신통
일단 경기를 할 때도 자세한 부분은 감독님이 먼저 가르쳐주시고, 나는 들으려고 한다. 감독님의 말대로 경기장에서 해보고 성공을 하게 되면, 습득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감독님한테 믿음을 드리고 있고, 서로 그 믿음을 쌓아가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최근 화제된 영상이 있다. 작전 타임 중에 천신통이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장면이 흥미진진했는데.
신통
경기 때 감독님이 물어보시는 질문에 실시간으로 대답하는 편인 것 같다. 내가 평소에도 그렇게 하는지 감독님한테도 물어보고 싶은데, 아마 평소에도 내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 같다(웃음).
호철 감독으로서도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네’ 대답만 하는 것보다는 소통이 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선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선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 선수에 맞춰서 얘기를 할 수 있다.
신통 한국어를 많이 배워서 다행이다.



유럽 무대 평정했던 세터 ‘호철 킴’
김호철 감독은 현역 시절 세터로서 유럽 무대까지 평정했다. 1980년 금성통신에 입단한 뒤 한 시즌 만에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 당시 한국 남자배구는 1978년 세계선수권에서 4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제 경쟁력이 높았다. 이를 계기로 국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기도 했다. 이탈리아 산탈 파르마 소속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김 감독은 1981-82, 1982-83시즌 이탈리아 리그와 컵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이탈리아 리그 최고 외국인 선수상 그리고 리그 MVP로도 3차례 선정됐다. 1982-83시즌에는 유럽배구연맹(CEV) 챔피언스리그 MVP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다. 이를 빛나게 해준 엄청난 노력도 있었다.

이탈리아 명장 안드레아 가르디니 감독도 작년 한국배구연맹(KOVO) 통합워크샵에서의 해외 우수지도자 초청 포럼에도 김 감독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가르디니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선수로도 같이 플레이를 했다. 난 미들블로커였다. 한 시즌 같이 뛰었다. 역사상 남을만한 선수다. 최고의 세터라고 본다. 스피드 배구의 핵심을 보여준 선수였다”며 그의 기억을 떠올렸다. 1995년 이탈리아에서 현역 은퇴를 결심한 뒤 바로 파르마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탈리아 연령별 대표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남자배구팀에서 수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21년부터는 여자 프로배구 IBK기업은행 사령탑으로 또다시 새 도전에 나섰다.

초중고 시절 ‘세터 김호철’은 어떤 선수였나.
배구를 하기 전에는 육상 선수로도 뛰었다. 배구 세터가 되기 전에는 공격수도 했었다. 대신중을 가면서 키가 작기도 하고, 재치도 있고, 빠르기도 하니 세터로 전향을 했다. 밀양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는데 안할 수도 없었다. 또 우리가 배구를 시작할 때는 많이 맞기도 했다. 토스할 때 한 번씩 실수를 하면 자로 손바닥을 맞았다. 그 당시에는 책가방이 뒤로 매는 것이 아니었다. 손으로 책가방을 들 수가 없어서 팔에 끼고 갈 정도로 손이 부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세터 훈련은 어떻게 진행됐었나.
처음에 세터를 할 때는 공을 잘 올려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콤비 공격을 많이 할 때였다. 여러 선생님들을 통해서 세터가 어떻게 콤비 플레이를 해야하는지 배웠다. 개인 연습도 많이 했다. 키가 작기 때문에 어떻게든 점프를 많이 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는 그 당시 센터(미들블로커)도 했었다. 지금 고등학교 키와 똑같은데, 그 때 고교 시절에는 비교적 키가 큰 편이었다. 더블 세터로 들어가서 공격도 했었다. 그래도 토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에 벽토스 2000개씩 했고, 줄넘기도 하루에 1000개씩 했다. 이를 고등학교 3년 내내 했었다. 볼에 대한 손 감각이 중요하다. 손으로 느끼는 그 감각 때문에 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잘 때도 공을 끼고 잤다(웃음).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능도 있었던 것 같다.

1981년 이탈리아 진출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일단 1978년 세계선수권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었다. 당시 한국 남자배구가 4위를 했었다. 이 대회를 통해 이탈리아 클럽팀들이 한국 선수들을 눈여겨봤던 것 같다. 세계선수권 이후 3년 동안 이탈리아 쪽에서 연락이 왔었다. 또 그 당시 ‘나는 작은 새’ 조혜정 씨도 이탈리아에 있었는데, 남자팀에서 조혜정 씨한테 연락이 갔었다. 조혜정 씨와 친분이 있었던 양희은 씨도 도와주면서 이탈리아로 가게 됐다.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일단 그 당시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해외 진출이 가능해서 대학교 3학년 때 군대를 갔었다. 1981년에 제대를 하면서 금성통신에 입단을 했지만, 1년 만에 나간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다(웃음). 다행히 회사에서도 인재 양성을 위해 해외 진출을 허락해주면서 갈 수 있었다. 배구협회와도 얘기를 했다. 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는 들어온다고 말하고 갔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했던 박기원, 이인도 있었고, 여자 선수들도 몇 명 있었다. 이탈리아 멤버들이 많이 있다(웃음).

문화, 언어도 낯선 머나먼 타국에서 어떻게 버텼나.
통역이 없어서 말이 안 통했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했다. 이탈리아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한테 부탁을 해서 배구 용어를 이탈리아말로 적어달라고 했다. 말은 못하지만 배구 용어는 알아야할 것 같아서 그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세터 사인을 선수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흰 종이에 손을 대고 직접 그렸다. 이를 복사해서 선수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공격수들에게 내가 ‘하나’라고 하면 넌 A를 뛰고, 넌 시간차를 가고, 넌 C로 가라고 하면서 플레이를 만들어갔다. 처음에는 선수들이 누가 들어가는지 몰라서 나야? 너야? 라고 말하면서 했다.

이탈리아 진출하자마자 유럽 무대의 ‘별 중의 별’ 자리까지 차지했는데.
처음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세터 포지션이다보니 장점이 있었다. 외국에서는 공격수들이 서로 공격을 더 많이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터인 나한테 잘했었다. 적응하기 수월했다. 또 이탈리아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성격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또 1980년대 초에는 이탈리아 배구 수준이 높지 않았다. 한국 배구가 한 수 위였다. 내가 하는 플레이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머리를 쓰면서 플레이를 만들어갔던 것을 이탈리아 선수들은 몰랐다. 그런 부분에서 힘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1995년 현역 은퇴를 결정하게 된 배경이 있다면.
아무래도 체력적인 한계가 있었다. 팀과 상의해서 일요일 경기를 하면 수요일까지 몸 관리를 하고, 목금토 팀 연습을 맞춰서 계속 뛰었다. 선수들과 100% 다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마지막에 팀과 사소한 일로 트러블이 있기도 했는데, 예전에 있던 팀에서 감독제의가 왔다. 그렇게 코치를 한 번도 안해보고 감독을 했다. 물론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지도자 공부를 했다. 어떻게 감독을 한 것인지, 팀 훈련 방법 등을 노트에 기록을 해왔었다.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
처음에는 동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경기 중에 내가 볼을 잘 올려줬는데 공격수가 아웃을 때리더라. 나보고 볼을 높게 달라고 하길래 다시 공을 올려줬다. 다시 더 높게 달라고 말하길래 엉덩이를 발로 찬 적이 있다. 3000명 관중들이 ‘우~’ 이러더라. 한번 그렇게 곤조를 부린 뒤에는 괜찮았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선수로 뛰면서 아쉬움은 없었나.
선수로서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일단 키가 작았다. 또 아쉬운 마음이 있다면 마지막 은퇴하기 전 3년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잘 올린 볼을 왜 공격수들이 못 때릴까 화를 냈었다. 이후에는 미스가 나와도 ‘내 탓이오’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더 재밌는 배구를 할 수 있었다. 이를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태국·일본·한국 토스 스타일 흡수 중인 천신통
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배구를 접하게 됐다. 아버지도 배구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초등학교 때 체육을 잘하면 중하교 진학할 때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배구를 시작하게 됐다.

세터 포지션을 맡은 이유가 있었나.
처음부터 세터를 하자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왼손잡이라 유리한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세터를 고려하게 됐다. 초등학교 때는 방과 후 개념으로 배구를 배웠다. 간단한 훈련만 했다. 중학교 때부터 유스팀 개념으로 체육부에서 훈련을 받았다. 오전에는 수업을 들었고, 오후에는 배구 훈련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하루종일 배구 훈련만 받았다.

2013년 어떻게 중국 여자배구리그 톈진에 입단하게 됐나.
일단 톈진에는 청소년팀으로 먼저 들어가게 됐다. 중국 내에서 4년마다 열리는 차이나올림픽이 있다. 청소년올림픽에 참가를 하게 됐다. 중국에서는 주소가 톈진, 청소년팀도 톈진 소속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톈진 팀에 들어가게 돼있다.

현재 페퍼저축은행에 뛰고 있는 장위랑도 오랜 시간 한솥밥을 먹었는데.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같은 팀에 있었다. 장위는 배구를 시작했을 때도 키가 컸었다. 점점 배구 기술도 늘었고, 발전하는 느낌이다. 지금도 성숙한 선수다.

2013년 천신통, 2024년 천신통은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일단 프로 생활을 해오면서 여러 감독님들을 만났다. 그 가르침도 다르다. 토스 스타일도 배우면서 성장해왔던 것 같다. 톈진 팀 감독님도 세터 포지션으로 뛴 선수였고, 2015~2016년에는 베이징 팀 감독님이 태국 감독이셨다. 세터 출신의 감독은 아니었지만 태국 스타일의 배구를 많이 가르쳐주셨다(당시 베이징 팀에는 태국 여자배구 대표팀 사령탑을 맡기도 한 키아티퐁 라드차타그리엥카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바 있다). 2019~2020년에는 다시 톈진 팀에서 일본 코치님이 계셔서 1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은 김호철 감독님으로부터 한국 스타일의 토스를 배우고 있다. 그래서 좋다.

중국-태국-일본-한국 토스 스타일은 어떻게 다른가.
일단 모두 아시아권 팀들이다. 토스가 빠르다. 그에 비해 중국은 빠르진 않다. 그래서 모든 특징을 모아서 나만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중국 국가대표 세터 딩샤, 야오디는 어떤 존재였나.
일단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분들이다. 경험도 많은 베테랑 선수다. 같은 팀원이었을 때도 많은 것을 배웠었다.



김호철 감독과 천신통의 ‘세터학개론’
세터의 매력은 무엇인가.

신통 경기장에서 흐름과 리듬을 파악하고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세터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코트 위에서 선수들을 이끌며 승리를 거두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다.
호철 처음 배구하면서 힘들게 배웠던 것이 상대를 어떻게 속이느냐였다. 그 속이는 쾌감이 있다. 물론 세터로서 마지막 토스를 결정해야 하는 중압감이 있지만, 상대를 속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 또 신통이가 말한 것처럼 내가 내 마음대로 플레이를 주도할 수 있고, 나머지 선수들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도 세터의 매력이다.

상대 미들블로커를 잘 속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호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토스 테크닉이 될 수도 있고, 상대 생각을 파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또 내 모션 등 행동으로 속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적절하게 섞어야 한다. 그 이전에는 상대 미들블로커들의 습성을 알아야 한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도 14개 팀이 있었는데 미들블로커 2명씩 28명의 미들블로커에 대한 특징을 모두 머릿 속에 넣어놓고 경기를 했다. 그 미들블로커들만 못 움직이게 만들면 우리 공격수에게 블로커 한 명만 오게 된다.

그 당시에는 팀에 분석관도 따로 없었을 듯한데, 어떻게 연구를 했나.
호철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할 때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를 많이 했다. 비디오 테이프로 경기 영상을 보면서 그 습성을 알아냈다. 제일 상대하기 힘든 선수는 잘 모르는 생짜배기다. 내가 앞서 말한대로 똑같이 행동을 했는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그러면 머리가 복잡해진다(웃음). 이후 내가 1987년도에 다시 이탈리아에 나갔을 때는 분석관이 생겼다. 그 때는 분석관 자료 받아서 새벽 2시까지 영상도 보면서 공부를 했다. 신통이도 상대 미들블로커 12명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웃음).
신통 (끄덕끄덕)
호철 또 그 당시에는 서브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서브가 약했기 때문에 80% 정도는 리시브가 정확하게 됐었다. 세터만 잘 움직이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배구가 달라져서 리시브 4, 50%를 갖고 플레이를 해야 한다. 이 안에서 경기를 운영하는 만큼 방법이 많이 줄어들긴 했다.

세터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많다. 빠른 판단력, 상대 포메이션과 수비 패턴의 약점 등을 이용한 전술 이해도, 테크닉, 리더십과 소통 등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신통
세터는 종합적으로 그 자질들을 갖춰야 한다. 가장 먼저 기술이 좋아야 하고, 전략도 필요하다. 마음가짐까지 3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호철 인내심이다. 플레이가 잘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다. 그 때 얼마만큼 평정심을 찾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어려울 때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팀을 끌고 갈 수 있느냐다. 결국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세터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기가 볼을 주고 알아서 하라는 사람, 하나는 뒤에서 자기가 헌신하면서 공격수들을 맞춰주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 유형 모두 장단점이 있다. 그래도 내가 아까 말했듯 선수를 그만두기 3년 전 스타일대로, ‘내 탓이오’라는 마음가짐으로 플레이를 했을 때 나 스스로도 안 지치고 재밌게 뛸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공격수에게 왜 못 때리는지 화를 내기도 했다. 화를 못 참았었다. 그래서 마지막 3년에 대한 기억이 좋다. 지금도 그 때 함께 했던 선수들과 친하게 지낸다. 이제 전부 할아버지가 다 됐다(웃음). 그 때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 세터들에게도 항상 공격수들에게 맞춰주라고 한다. 그러면 내가 편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두 가지 유형 중에서는 후자가 낫다. 물론 이는 인내심이 뒷받침돼야 한다.

세터가 본 세계 최고의 세터는 누구라고 보나.
신통
무조건 우리 감독님이다. 그리고 현역 여자 선수 중에서는 폴란드 국가대표 선수인 요안나 보워슈라고 생각한다.
호철 아시아쪽에서 처음 배구 접했을 때 본 일본 세터 네코다(1944년생의 네코다 가쓰토시는 일본 국가대표 세터로 1972년 올림픽에서 일본의 우승을 이끈 선수다)다. 세계적인 선수였다. 그 선수를 많이 흉내를 내려고 했다. 많이 배웠다. 키는 나보다 조금 큰데 진짜 잘하는 선수였다.

천신통이 세터로서 안고 있는 고민이 있다면.
고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 토스 스타일을 한국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매일 감독님 옆에서 의견을 들으면서 배우고 있다.

김호철 감독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세터들을 가르칠 때 완전히 바꾸려고 했다. 세터를 그렇게 하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신통이도 처음 왔을 때 바꾸려고 했었다. 그러니 신통이가 불안해하더라. 그러다보니 신통이가 잘하던 플레이도 못하더라. 그래서 신통이가 잘하는 것을 계속하되 조금씩 고쳐나가려고 했다. 팀을 위한 플레이를 위해서였다. 최대한 편안하게 토스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신통이 마음부터 편안해야 한다.

천신통은 세터로서 최종 목표가 있다면.
배구 선수라면 누구나 우승을 목표로 세운다. 개인적으로는 매경기 토스를 잘하고 싶은 것이다. 감독님이 주문하신 점이나 내 생각을 잘 섞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보내고 싶다.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김호철 감독은 배구 사령탑으로서 최종 목표가 있다면.
남자팀에서는 다 이뤄봤다. 여자팀에서는 IBK기업은행을 예전처럼 우승팀으로서 명예로운 팀으로 만들어놓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 이보미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2월호에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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