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청문회까지 했던 감독과 마음이 흔들리던 세터가 만드는 시즌의 끝은

여자프로배구 / 김종건 / 2023-03-06 07: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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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6연승의 KGC인삼공사는 무엇이 달라졌나. 신뢰와 평정심, 이기고 싶은 의지의 힘

 

114일 현대건설과의 4라운드에 KGC인삼공사는 무기력하게 물러났다. 팀은 4연패였다.

이날 세터 염혜선의 패스는 정신이 없었다. 이번 시즌 내내 그랬다. 어떤 날은 외국인 선수에게 무지막지하게 공을 올렸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됐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감독마저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은 염혜선의 부진을 걱정했다. 그는 국가대표팀의 주전 세터다. 도쿄올림픽 4강을 달성한 베테랑이 무너지면 대한민국 여자배구는 2024파리올림픽에 출전할 희망마저 사라진다. 여러 부진의 이유가 나왔다. 무엇보다 고비에서 너무 흔들렸다.

 

코칭스태프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심했다. 베테랑에게 기술적인 얘기를 할 수도 없었다. 자칫 말을 잘못하면 서로가 더 상처만 받고 마음마저 닫아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다음날 훈련 때였다. 전날 패배로 밤새 고민했던 KGC인삼공사 고희진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훈련장에 선수들이 모였다. 염혜선이 멀리서 보이자 감독은 성큼 다가갔다.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따뜻하게 껴안아 줬다. “나는 너를 믿는다. 우리 팀 모든 선수도 너를 믿는다는 얘기만 조용히 해줬다.

 

 

울림이 있었다. 염혜선은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스스로가 최근의 부진에 고민해왔고 마음속으로 큰 상처도 받아왔음이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이 결과를 질책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신 따뜻한 포옹과 함께 진심을 담아 위로해줬다. 저절로 흐르는 눈물. 여자의 눈물은 여러 의미로 해석되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열겠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고희진 감독은 염혜선이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뒤 얘기를 꺼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 마스크를 쓰고 경기를 하면 표정을 감출 수는 있겠지만 동료 선수들에게 뭔가 자신감이 없다는 사인으로 비칠 수 있다. 네가 언더핸드로 공을 올리면 동료들도 불안해한다. 범실을 해도 좋으니 용감하게 오버헤드로 쏴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너를 믿고 이번 시즌을 갈 것이다고 했다.

 

 

그날 이후 염혜선은 마스크를 벗었다. 공격수에게 올려주는 공에 자신감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베테랑이지만 야간 훈련을 자청했다. 후배 정호영과 자주 호흡을 맞췄다. 위기에서는 스스로 헤쳐나가려는 의지도 보여줬다. 125일 흥국생명과의 4라운드에서 정효영까지 속이면서 했던 패스 페인트는 염혜선의 투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 순간만큼은 여전사의 표정이었다.

 

물론 경기의 결과는 선수의 의지만으로 만들 수 없다. 염혜선은 이후 2경기에서 또 고비를 넘지 못했다. 131일 도로공사와의 5라운드는 정말 뼈아팠다. 1세트 16-9로 앞서고도 역전패당했다. 세트 초반 도로공사의 블로킹을 쉽게 헤집던 패스가 중반 이후 사라졌다. 공격수들이 제대로 때릴 수 없는 공만 올라갔다. 첫 세터를 23-25로 내주더니 세트스코어 0-3으로 완패당했다. 그 후유증은 23일 흥국생명과의 경기까지 이어졌다. 고희진 감독은 중요한 순간마다 벤치에서 사인을 내며 세터의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주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KGC인삼공사가 봄 배구에 나가느냐 마느냐가 걸린 시즌의 고비가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전 세터를 안정시켜야 했다. 염혜선은 시즌을 마치면 FA 선수가 된다.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겠지만 힘들게 운동하는 이유도 있다. 동생이 외국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학비를 책임지겠다고 가족에게 약속했다. 이번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고 만족할만한 FA 재계약을 맺어야 할 분명한 이유였다. 다만 잘해야 한다는 의지가 경기에서 평정심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더 필요했다. 침착함과 위기일수록 자신을 다스리는 냉철함이었다. 결국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다. 주변에서는 힘들어할 염혜선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기 위해 종교를 가져보라는 권유도 했다.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누군가에 기대기보다는 자신이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는 길을 택했다. 이런 염혜선을 감독은 참고 기다려줬다. “내게 염혜선은 무한신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이 믿고 있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KGC인삼공사는 5라운드 초반 2연패 이후 4연승을 내달렸다. 경기력은 들쭉날쭉했지만, 이기면서 팀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염혜선은 경기 때마다 감독의 신뢰에 보답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6라운드 첫 경기. 페퍼저축은행을 잡고 시즌 처음으로 3위에 올랐다. 5연승 동안 승리의 주역은 계속 바뀌었다. 고의정, 박혜민, 한송이가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했다. 엘리자벳은 압도적인 득점 1, 공격종합, 오픈공격 각각 2위로 팀이 필요한 대포 역할을 꾸준히 해줬다. 속공 부문 2,4위 정호영과 박은진은 현대배구에서 꼭 필요한 중앙에서의 다양한 플레이로 거들었다. 몰빵에서 벗어난 KGC인삼공사는 날개와 중앙의 균형이 어우러진 팀이 됐다. 다양한 공격 재료를 잘 버무려줄 세터가 중심만 잘 잡아준다면 봄 배구의 길이 열릴 듯했다. 그런 면에서 팀의 운명은 사실상 염혜선이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28일 도로공사와의 6라운드. 인삼공사는 3-2로 승리했다. 역대 최장시간 경기 3위인 2시간31분의 혈투 끝이었다. 1,2세트 고희진 감독이 준비했던 아웃사이드 히터(OH) 한송이 카드는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상대 배유나를 견제하기 위해 이소영을 5번 자리에서 출발시키고 대각의 한 자리를 장신의 한송이에게 맡기는 계획이었다. 아쉽게도 모처럼 선발 OH로 나선 한송이가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1세트를 먼저 따낸 KGC인삼공사는 2세트 듀스 혈투에서 졌다. 한송이의 마지막 공격이 하필 이윤정의 블로킹에 걸렸다.

 

 

기세를 잡은 도로공사는 3세트를 쉽게 따냈다. 이번 시즌 두 팀 간의 경기에서 나왔던 패턴이 반복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반전이 기다렸다. 4세트를 앞두고 고희진 감독은 모든 선수를 불러 모았다. 그의 메시지는 확실했다. “지금 여기, 지고 싶은 사람 있냐?”라고 했다. 모든 선수가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고 감독은 여기서 우리가 마음을 모으면 이겨낼 수 있다. 그렇게 믿는다고 말했다. 그 이후 선수들이 경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특히 웜업존의 선수들은 일렬로 서서 동료들을 응원했다. 기를 모았다. 이는 코트의 6명에게도 전해졌다. 매치포인트 위기에서 엘리자벳의 백어택으로 한숨을 돌린 KGC인삼공사는 경기를 5세트까지 몰고 갔다. 감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의 눈빛을 봤고 믿었다고 했다.

 

염혜선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5세트. 그의 선택은 용감했다. 초반 박혜민을 이용해 주도권을 잡았다. 베테랑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막판이었다. 9-9 세트플레이 상황에서 정호영에게 쏴준 B퀵으로 앞서갔다. 11-9 랠리 상황에서도 박은진에게 또 B퀵을 쏴주며 득점으로 이끌었다. 심장이 떨리는 고비에서 주저하지 않고 B퀵을 길고 빠르게 뽑을 정도로 염혜선은 냉정했고 또 과감했다. 벤치의 사인이 나오면 주저하지 않고 실행할 정도로 염혜선과 벤치의 신뢰도 한몫했다. 결국 그 공격에 도로공사의 조직력은 허물어졌다. 인삼공사는 493일 만에 상대 전적 9연패의 사슬을 끊었다. 팀의 6연승은 11년이 훌쩍 넘은 무려 4107일 만의 기록이었다.

 

 

KGC인삼공사는 34GS칼텍스와의 홈경기에서 0-3으로 완패하며 연승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전날 도로공사가 IBK기업은행에 1-3으로 지는 바람에 패배의 충격은 다소 완화됐지만 아쉬운 결과였다. 6일 현재 1716패 승점51로 한 경기를 덜 치른 4위 도로공사(1616패 승점49)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했다. 4일 경기 뒤 몇몇 극성 팬은 고희진 감독을 습관적으로 비난했다. 타임 아웃 때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로 보인다.

 

 

고희진 감독은 KGC인삼공사 사령탑에 선임됐을 때 그를 반대한 팬들 앞에서 청문회를 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걸핏하면 항의 버스를 언급하면서 감독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는 그들이 원하는 외국인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은 감독의 투지를 더 자극한다. 그는 이 팀에서 3,4위 하려고 경기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송이에게 새로운 역할을 준비시키는 이유도, 고의정 이선우 채선아 박혜민에게 계속 기회를 주는 이유도 힘과 높이의 대결이 중요한 봄 배구의 특성을 잘 알아서다. KGC인삼공사와 염혜선, 고희진 감독이 만드는 시즌 결말이 궁금하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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