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면 은퇴까지? 프로선수의 적, 스트레스 극복하기
- 매거진 / 이광준 / 2019-02-22 09:22:00
2019년 초부터 배구계에 안타까운 얘기가 들려왔다. GS칼텍스 주전 리베로 나현정과 208cm 삼성화재 장신 미들블로커 정준혁이 팀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이들이 코트를 떠나기로 결심한 데는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구에만 매진하며 힘든 훈련을 이겨낸 뒤 ‘배구선수’라는 꿈을 이뤘는데, 이들은 왜 배구코트와 작별을 선택했을까. <더스파이크>는 OK저축은행 전담 심리상담사인 케이스포츠 심리상담센터 김미선 박사(42)의 도움을 받아 기량만큼이나 선수들의 컨디션에 영향을 주는 심리적인 요소를 들여다봤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 스트레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스트레스는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 학업 스트레스, 업무 스트레스, 인간관계 스트레스 등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프로선수라는 직업은 조금 다르다. TV를 통해 자신의 경기가 중계되고, 매 경기에서 보여준 플레이는 각종 수치로 평가돼 평생 기록으로 남는다. 소위 ‘보이는 직업’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도, 찰나의 표정도 기사, 사진, 동영상 등에 담긴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은 늘 긴장의 연속이다.
성적에 대한 압박감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 동료들과 관계,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수백만 개의 눈, 하나부터 열까지 남겨지는 기록과 그에 대한 비난까지. ‘프로의식’으로 이겨내기엔 때때로 이 모든 것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경기력 저하로 이어진다. 코트 위에서 실수가 나오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등 일명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일상생활에서도 그 증상을 확인할 수 있다. 말수가 없어지고, 훈련에서 적극적인 모습이 사라져 결국 운동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지난 2013~2014시즌 V-리그에서 활약했던 여자선수(외국인 선수 제외) 79명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선수들의 받는 스트레스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구성원과 갈등(35%)과 유능감 상실(26%)이었다.
선수들이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는 환경이 변화할 때 극대화된다.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와 프로로 진출했을 때가 그렇다. 새로운 구성원과 함께하며 생기는 갈등, 마찰 등이 심리적 상처로 남으면 경기력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팀워크가 저하되기도 한다. 지도자와 선수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도 선수들에게 무력감, 압박감, 상실감 등의 감정으로 쌓일 수 있다.
프로의 문턱을 넘은 선수 대다수는 소속 학교에서 에이스 역할을 했던 선수들이다.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에서 팀의 주축 선수로, 맏형 혹은 맏언니로 팀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프로 세계에 들어오니 역할이 180도 바뀌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출전 기회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가다 코트 위를 밟더라도 ‘실수하면 바로 교체되겠지’라는 걱정과 부담감에 휩싸인다. 코트 위에서의 걱정은 ‘이렇게 계속 경기를 못 뛰면 운동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는 건 아닐까’, ‘연봉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면 어떡하지’ 등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이니, 코트 위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기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선수들은 입을 모아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고 말한다. 프로는 무조건 ‘잘하는 사람’이 주전 자리를 맡는다. 부족한 선수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걸출한 선배들, 치열한 동기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까지 주전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하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웜업존으로 밀려나 코트에 설 자리가 줄어든다.
실수는 빨리 잊고, 다음을 준비해야한다
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은 선수 개개인의 성향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거나 지도자, 선후배와 소통이 활발한 환경에서 운동을 했던 선수들은 스트레스가 쌓여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일은 빨리 잊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에 집중한다. 반면 스트레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선수는 대개 예민한 성격이거나, 강압적인 운동 환경 속에서 지도자 또는 선배와 일방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은 지나간 실수나 사건에 매달리며 불안해하고 운동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프로는 경기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경기에만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점수 하나, 볼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머릿속에 자꾸만 불안함이 세력을 확장한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실수가 나오고, 실수하면 다시 또 걱정에 사로잡히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김미선 박사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 중 하나로 ‘나만의 루틴 설정하기’를 제시했다. 실제로 프로선수들과 상담할 때 쓰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서브 범실을 했을 때 ‘실수했다’라는 자책감에 빠지기 전 벤치에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의사 표시를 한다든가, 주심의 판정을 확인한 후 곧바로 리시브를 준비하기 위해 자세를 낮춘다든가 하면서 과거의 실수를 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앞으로 진행될 경기에 집중하기 위한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을 준비하는 자세다. 실수를 했든 패배를 했든, 이미 지난 일이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도록, 경기에서 이길 수 있도록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김미선 박사에 의하면 지난 2016~2017시즌, 2017~2018시즌 두 시즌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던 OK저축은행 선수들은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한다. 경기를 앞두고 ‘또 지는 건 아닐까’, ‘또 지면 어떡하지’ 같은 고민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실수, 또는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다.
지난 2007년 프로축구단 FC서울에서 처음으로 상담을 통한 심리 훈련이 도입된 이후, 종목을 불문하고 선수들의 심리적인 요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상담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을 때 치료법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김미선 박사는 “운동선수라면 모든 선수들이 이기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상담은 문제가 있어서 받는 치료가 아닌 더 좋은 경기력을 보이기 위한 훈련이다”라고 설명했다.
스포츠는 신체적 한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세계다. 배구에서 ‘무승부’란 없다.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이를 효과적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다.
오롯이 ‘나’에 집중하기
김미선 박사는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것,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식부터 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경쟁상황에 노출되는 선수들에게 스트레스는 어찌 보면 성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반복된 스트레스와 마주할 때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 정리가 필요하다. 스트레스에 발목을 잡힐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익혀 성장의 발판으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스트레스에 대해 가장 먼저 객관화해야 할 것은 원인 파악하기다. 지금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나로 인해 오는 것인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오는 것인지를 구분한 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심판의 판정이나 감독의 선수기용은 선수 권한 밖의 일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들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댓글도 마찬가지다. 댓글을 쓴 사람의 감정에 따라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에 댓글 내용에 상처받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자신의 통제 범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집중한다면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김미선 박사는 ‘내가 현재 무엇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객관적인 사고를 통해 판단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스트레스로 인한 경기력 저하를 막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김미선 박사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익히고, 스트레스를 극복할 루틴을 짠 뒤에 자신이 수행해야 할 절차에 집중하다보면 외부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줄어들 수 있다”라며 “자신감이 없고 불안했던 마음을 루틴을 통해 스스로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경기력이 올라가고,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스트레스를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앞의 자료에 의하면, ‘사회적 지지’가 스트레스의 극복 요인으로 가장 큰 비중을 하지하고 있다. 동료, 가족, 지도자 등의 응원과 격려가 힘든 시기를 겪는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만약 주변에 말수가 적어졌다거나 운동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선수가 있다면 위로와 격려의 한 마디를 건네보자. 사소한 한 마디일지라도, 상대방에게는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지도 모른다.
김미선 박사는?
선일여고와 숙명여대를 졸업한 스포츠심리상담 전문가다. 학창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한 경험을 갖고 있다. 직업선수의 심리 상태를 잘 알고 있다. 현재 케이스포츠 심리상담센터 대표직을 맡고 있다. 숙명여대, 한국체육대, 동국대에서 강의 중이며, SBS 영재발굴단 방송 및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OK저축은행 배구단의 심리상담도 진행하고 있다.
글/ 이현지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케이스포츠 심리상담센터 제공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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