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준의 배구수다] 선명여고 독주, 그 속에서 본 여고부 그림자

매거진 / 이광준 / 2018-05-10 0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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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부 선명여고는 올해 3월 춘계연맹전과 4월 태백산배, 이어 5월 종별선수권까지 우승하며 독주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사실 올해만의 일이 아닙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선명여고는 출전한 대회 대부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른 팀들의 두려움 대상이 됐습니다. 최근 3년 동안 선명여고는 출전한 대회에서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곤 모두 우승하는 놀라움을 보였습니다. 선명여고가 우승을 놓쳤던 단 한 대회는 지난 2017년 10월에 열렸던 ‘2017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선명여고는 출전할 때마다 우승하는 여고부 최강팀입니다. 선명여고가 이렇게 오랜 시간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이에 따른 순기능과 역기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고부 제왕, 선명여고 독주 체제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관심과 투자가 만든 ‘레알 선명여고’



선명여고는 사립 고등학교로 1987년 배구부를 창단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 34회, 준우승 8회, 3위 5회(2018년 5월 10일 기준)에 빛나는 우수한 실적을 올렸습니다. 그야말로 여고부 최고다운 성적입니다. 선명여고는 이재영(흥국생명)·다영(현대건설) 두 쌍둥이 자매, 최은지, 하혜진(이상 한국도로공사), 지민경(KGC인삼공사) 등 많은 프로 선수들을 배출한 배구명문 고등학교입니다.



(사진 : 지난 4월 KOVO 시상식에서 함께 자세를 취한 선명여고 출신 이재영, 다영 자매)


선명여고 설립 재단인 경해재단의 강경종 이사장은 평소 배구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난 4월 태백산배에도 강 이사장은 현장을 찾아 선수들을 응원했습니다. 이사장 관심은 곧 배구부 투자로 이어졌습니다. 김양수 선명여고 감독은 “이사장님께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좋은 시설 하에 운동할 수 있다. 훈련시설, 체육관, 숙소 등 여러 부분에서 여고부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부담해야 할 돈은 전혀 없다. 기본적인 물품부터 모든 것을 학교에서 마련해줘 선수들은 오직 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지난해 9월 열렸던 2017~2018 KOVO 신인드래프트에서 선명여고는 이원정과 백채림(이상 한국도로공사)을 프로로 진출시켰습니다. 이에 따른 학교지원금 역시 선수들을 위해 사용됐습니다. 체육관 냉난방 시설을 확충하는 데 썼다는 게 김 감독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설 속에서 운동하니 선수들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태백산배에서 만난 선명여고 선수들은 하나같이 “선명여고 이름으로 운동하고 있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습니다. 화끈한 지원, 그리고 화려한 성적. 선수들에게는 최상의 운동 환경인 셈이죠.



좋은 환경을 갖추니 선수들이 자연스레 선명여고로 몰렸습니다. 배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죠. 특히 학부모들에게 선명여고는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입니다. 가장 먼저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훈련 환경이 잘 갖춰져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게다가 우승을 자주해서 선수 경력에 큰 보탬이 되니 부모 입장에서는 선명여고가 매력적인 학교임이 분명합니다.



중고배구연맹 한 관계자는 “확실히 부모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자녀를 좋은 환경으로 보내기 위해 그 쪽으로 거주지를 옮긴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양수 감독 역시 “부모들이 이곳으로 진학시키기 위해 적극적이다. 많은 선수들이 몰리는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명여고에 좋은 선수가 많아졌고, 결국 지금과 같은 초호화 군단이 갖춰진 것입니다. 이를 보고 일각에서 선명여고를 스페인 프로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에 빗대 ‘레알 선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몇 년 간 행적을 볼 때, 꽤 어울리는 별명인 것 같습니다.



잘하는 선수들이 몰려 있으니 그 안에서 경쟁 체제도 활발해졌습니다. 선수들에게도 건강한 자극이 됐고 훈련에 더 힘쓰게 됐죠. 선명여고 3학년 이예솔은 “잘 하는 선수들이 함께 있으니 더 욕심이 생긴다.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 욕심을 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선수들이 한 데 모여 서로 경쟁심을 불태운다는 점은 선명여고가 가진 또 다른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 지난 5월 6일, 종별선수권에 참가한 서울중앙여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팀이지만 올해 단 아홉 명으로 시즌을 치르고 있다.)


유망주 쏠림현상, 다른 팀은 선수 수급난



그러나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선명여고 독주 체제는 다른 팀들의 사기 저하를 몰고 왔습니다. 좋은 자원들이 한쪽으로만 쏠리니 성적을 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였죠. 중고배구연맹 관계자는 “유망주 쏠림 현상 때문에 많은 학교에서 배구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선명여고가 가장 위에서 실력 발휘를 하고 있는 터라 다른 팀으로선 좀처럼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 말이었죠. 좋은 선수들 역시 선명여고로 쏠리면서 선수 수급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중고배구연맹의 한 관계자는 이어 “이번 대회에 여고부 출전 팀이 몰린 것은 지난 춘계연맹전에 출전한 선명여고를 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3월 춘계연맹전에서 우승했던 선명여고가 이번 태백산배에는 안 나올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명여고는 두 대회 연속 출전했고 두 대회 모두 우승했습니다.



또 지난 태백산배 여고부 결승전에는 선명여고와 원곡고가 경기를 치렀습니다. 주위 많은 팀들이 내심 원곡고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선명여고 아성을 무너뜨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이렇게 다른 팀들 사이에서 생긴 ‘반 선명여고’ 분위기는 가볍게만 볼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고부간 전력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다른 학교에서는 선수 수급 문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지난 태백산배에 참가한 여고부 현황을 보면 포항여고와 부개여고가 7명, 강릉여고와 광주체육고가 8명으로 등록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인원이 적은 학교는 볼 걸 1명, 마퍼 1명을 쓸 여유조차 없었습니다(중고등부는 보통 각 팀에서 볼 리트리버 1명, 마퍼 1명을 정해 경기를 치릅니다. 마퍼는 정해지지 않고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걸레를 들고 나와 닦는 식입니다). 땀 닦을 선수가 없어 벤치에 있던 코치가 걸레를 들고 들어가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죠.



물론 이러한 선수 수급 문제가 선명여고만의 문제는 결코 아닐 겁니다. 그러나 한 학교에 유망주가 몰리는 바람에 여고부 전체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곧 여고부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쏠림 현상은 사실 많은 지도자들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선명여고 감독까지도 우려 목소리를 꺼냈습니다. 김양수 감독은 “한 곳으로 선수가 몰리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 학교로 많이들 오고 있지만 절대 반갑지만은 않다”라며 걱정을 표시했습니다.




(사진 : 올해 선명여고 대항마로 기대를 모은 원곡고)


근본적 문제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전문가들은 ‘얕은 선수층’을 근본적인 문제라 꼽았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여자배구 판이 작아서’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팀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려면 뛰어난 신입생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여고부는 좋은 신입생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죠. 좋은 선수가 적어지면서 에이스 한 명에 성적이 좌우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에이스가 졸업하면 팀이 무너지는 식이 되는 것이죠.



팀에 에이스가 하나만 있는 구조는 선수 개인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팀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공격을 에이스에게 집중시킬 것이고, 어린 선수들이 일찍부터 겪는 ‘혹사’는 빛을 보기도 전에 선수생명을 무너지게 할 수 있습니다. 승리가 필요한 지도자들에게도 이는 난감한 문제일 겁니다. 에이스에게 공을 더 줘 승리를 따낼 것인지, 선수생명을 생각해 눈앞의 성과를 포기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겠죠.



여러 중고배구 지도자들은 “선명여고 문제는 여자배구 전체 판이 작아 발생한 문제다”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정책적으로 엘리트체육 대신 생활체육을 강조하는 풍조도 한 몫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각 학교, 지자체에서 만든 클럽 팀에는 선수가 많아지고 있는 반면 엘리트체육으로 배구를 하는 선수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입니다. 한 고등부 감독은 “생활체육으로 배구를 하는 친구들 가운데 좋은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을 강제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여고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여자부 프로 무대 또한 좋은 신입 선수들이 없어 고민이 큰 상황이죠. 몇 년째 뚜렷한 A급 스타가 등장하지 않아 고민이죠(물론 올해 여고부 3학년 선수들 가운데 좋은 자원이 많아 기대를 모으지만, 여기서 이 얘기는 잠시 접어두겠습니다).



몇몇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여자배구를 ‘일(一)자 구조’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아래(중고 아마추어 배구)가 탄탄하지 못해 위(프로 배구) 역시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피라미드 형 구조가 가장 안정적인 프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V-리그 여자부는 정말 적은 인원 몇 명으로만 유지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한때 제기된 ‘여자부 신생팀 창단’ 문제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는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아직도 V-리그 여자부는 주전급과 벤치 멤버 격차가 큽니다. 중간 단계를 연결해 줄 선수들이 부족합니다.



이는 남자부보다 여자부 쪽이 더 심각합니다. 고등부 배구와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남고부는 남성고, 제천산업고, 경북사대부고 등 전통적으로 강한 팀들이 존재하지만 여고부처럼 ‘독주’ 체제는 아닙니다. 중고배구연맹 관계자는 “확실히 남자부에는 선수들이 꽤 있다. 그래서 한 팀이 독식하는 형태는 나오지 않는다. 선수 분배 문제도 과거보다 훨씬 나아진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3월 여자부 샐러리캡 문제가 대두됐을 당시, 여자부 여섯 개 구단 관계자들이 ‘선수 부족 문제’를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대부분 구단에서는 “프로에서 통할만한 스타 선수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리그 인기가 올라감에 따라 선수도 많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죠.




중고배구 선수 저변 확대해야



여자배구 인기는 확실히 상승세입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프로스포츠 중 하나로 입지를 굳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취약한 구조를 가졌습니다. 제가 여고부에서 찾은 이 문제는 단순히 여고부로 한정지어선 안 될 것입니다. 기초공사가 부실한 건물은 반드시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시간문제일 뿐이죠. 지금 여자 프로배구는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상황입니다. 겉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아래는 위태로운, 그런 현실이죠.



샐러리캡 문제가 대두될 당시 한 차례 이 문제가 떠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저는 다른 곳에서 또 한 번 이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지금의 ‘여자배구 인기’가 앞으로 더 이어지려면 이 문제는 지금부터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스타 없이 프로 스포츠가 유지될 순 없습니다. 프로 스포츠가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스타들이 끊임없이 빛나야 합니다.



선명여고의 사례는 문제점 뿐 아니라 해결책도 함께 보여줬습니다. 투자와 관심. 이것이 뒤따른다면 자연스레 선수가 몰린다는 것이죠. 물론 현실적으로 사립학교인 선명여고가 투자하는 금액과 비슷하게, 혹은 그 이상 투자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대한민국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 모두 이에 대한 문제 인식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매 해 ‘유소년 배구’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알 수 있죠. 그러나 특정 학교에만, 몇몇 선수에만 한정된 지원이 아닌 여고부 전체, 나아가서 중고배구 전체를 보고 판을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한 학교의 독주로 인해 다른 학교가 박탈감을 느끼고,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 분열이 생긴다면 이보다 최악은 없을 겁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아마추어, 프로, 협회와 연맹이 뜻을 모아야 합니다.


글/ 이광준 기자


사진/ 문복주, 홍기웅, 이광준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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