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인 그녀 황연주, 기록 위에 우뚝 서다

매거진 / 이광준 / 2018-01-12 0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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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12월호이자 <더스파이크> 두 번째 표지를 장식했던 황연주.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그를 만났다. 그 시간동안 황연주는 한국배구의 역사를 새로이 써내려갔다. 그가 가는 길은 아무도 가지않았던 길, 발걸음을 딛으면 늘 처음이다. 그리하여 V-리그 최초로 개인통산 5,000득점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그 후 한 달이 지난 지금은 5,110점(1월 12일 기준)으로 대기록에 멈추지 않고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지난 12월 15일 현대건설 체육관에서 황연주를 만나 꽃사슴에서 기록의 여왕이 되기까지,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새 역사를 쓰다



대기록 현장이었던 지난 12월 5일 현대건설과 IBK기업은행간의 경기로 잠시 돌아가보자. 이날 관심은 단연 황연주였다. 앞선 경기까지 4,990득점을 기록 중이던 그가 과연 5,000득점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시선이 집중됐다.



4세트 초반까지 9득점을 올리며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하지만 이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몇 차례 블로킹 찬스도 있었지만 득점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팀에게도 패배의 그림자가 덮쳤다. 세트스코어 1-2의 열세. 심지어 4세트 21-24로 내몰렸다.



그렇게 그의 기록도 뒤로 미뤄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 때 엘리자베스의 손끝이 반짝였다. 연이어 3득점을 뽑아낸 것. 이에 힘입어 현대건설은 순식간에 승부를 듀스로 끌고 갔다. 26-26에서 희비가 갈렸다. 현대건설이 양효진의 시간차와 이다영의 블로킹 득점을 묶어 4세트를 가져갔다. 황연주에게도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5세트 9-13에서 IBK기업은행이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메디가 때린 시간차는 그대로 황연주 손에 걸렸다. 그토록 바라왔던 한 점. 황연주가 5,000득점을 달성한 순간이었다. 대기록 앞에 관중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막상 황연주는 “저희가 지고 있는 상황이라 솔직히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느낌은 없었어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개인 통산 5,000득점. 이는 곧 V-리그 남녀부를 통틀어 최초 5,000득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프로배구 출범 이후 그보다 많은 득점을 올린 이는 없었다. 황연주도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점에 그 의미를 뒀다. “처음에는 4,500득점이나 5,000득점이나 똑같은 기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꾸준히 했구나’ 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주위에서 5,000득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앞으로 다른 선수들이 기록을 세울 때 제 이름이 계속 거론될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그에게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배구에 대한 애착도 있지만 부모님이 제가 배구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세요. 자랑스러워하시죠. 저한테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만약 제가 그만두면 더 이상 어디에서도 ‘황연주’라고 알아주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부모님에게 좀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힘이 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를 일으킨 건 부모님이었다. 황연주는 “부모님께서 엄하셨어요. 아마 제가 더 약해질까 봐 더 그러셨던 것 같아요. 저도 부모님 성격을 알잖아요. 그래도 엄마는 가끔씩 편지도 써주시고는 하셨어요. ‘항상 네 편이니까 힘내라’라는 내용이었죠.”



황연주가 5,000득점을 한 그 날, 부모님에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축하한다”라는 짧은 말 한마디. “저도 그렇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도 막 크고 요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어쩌면 저처럼 부모님 역시도 4,500득점과 5,000득점이나 같은 기록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하지만 황연주는 그 짧은 문자 하나에 담긴 깊은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곡차곡 쌓인 열 네시즌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시작한 배구. 황연주는 중학교 2학년 무렵 처음으로 배구공을 손에 들었다. 동기들보다 늦게 시작한 탓에 어린 시절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은 초등학교 3~4학년에 시작해서 기본기를 다졌는데,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도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프로에 올 생각도 없었어요. 다른 선수들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황연주는 1순위로 GS칼텍스에 지명된 나혜원에 이어 두 번째로 흥국생명의 부름을 받았다. 의외라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것이 한일전산여고에서 공격력을 자랑하긴 했어도 ‘톱클래스’의 선수는 아니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손목 부상으로 시즌 초반 경기에 거의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흥국생명 사령탑이던 고 황현주 감독은 “잠재력이 빼어난 선수”라며 주저 없이 황연주를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 생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계약을 할 때 5년이더라고요. 5년만 버티자 생각했어요.”



황연주는 데뷔 시즌부터 펄펄 날았다. 13경기서 230득점을 폭발시키며 팬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신인상도 그리고 서브상, 백어택상 모두 그의 차지였다. 그야말로 신인으로서는 최고의 한 시즌을 보냈다. 이후 김연경(상하이)과 함께 흥국생명 전성기를 이끌었다. 2005~2006, 2006~2007, 2008~2009시즌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2010년, 황연주는 FA를 통해 현대건설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2010~2011시즌 팀에 첫 우승을 안겼다. 황연주는 챔피언 결정전 내내 활약을 펼치며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힘을 더했다. 그 해 황연주는 올스타전 MVP뿐만 아니라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MVP 모두 거머쥐며 최고의 전성기를 뽐냈다.



프로 입단 당시 5년만 뛰겠다는 생각은 10년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열 네시즌 째가 됐다. 그리고 여전히 황연주는 코트 위에 서 있다. 그 시간동안 황연주는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에게 지난 시간을 돌아봐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모든 시즌이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아요”라는 대답을 전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너무 오래 뛰었나 봐요(웃음). 20살, 21살 때는 거의 기억이 안나요. 드문드문 날 뿐이죠.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 때 선택했던 것들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제가 못했던 시즌도 있을 테지만 다시 돌아가서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황연주는 꾸준히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을까. 그러자 황연주는 “매 시즌이 힘든 것 같아요”라고 입을 뗐다. 이어 “어느 시즌이 가장 힘들었다기보다 배구가 안 될 때가 가장 힘든 것 같아요. 하다보면 잘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잖아요. 그럼 그 날이 제일 힘든 거예요. 잠도 안 올만큼 스트레스 받는 날도 많죠”라고 말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꾸준함’ 덕분이었다. ‘황연주’라는 이름값이 주는 기대감이 때로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을 때 보여주고 싶어요. ‘나이가 더 들어서 내가 잘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항상 해요. 그런데 지금은 할 수 있잖아요. 이럴 때 더 많이 하고 싶고 공도 더 많이 때리고 싶어요.”



그리고 황연주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도 있다고 했다.



“제가 잘하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주위에서 도와주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지금도, 그 전에도 같이 해주신 감독님이나 코치님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선수 기용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물론 제가 못하는데 뛰게 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제가 잘할 때도 못할 때도 믿음을 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 꾸준히 할 수 있었어요.”




지난 시즌 아픔은 안녕



2016~2017시즌 4위에 그치며 봄 배구에 나서지 못했던 현대건설. 앞서 챔피언의 왕좌를 차지했던 터라 좌절의 무게감은 더 크게 느껴졌다.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이도희 감독이 새로이 지휘봉을 잡았다. 주전 세터 얼굴도 달라졌다. 염혜선이 FA로 팀을 이적하며 입단 4년차를 맞는 이다영에게 팀 조율의 막중한 책임감이 얹어졌다. 황민경을 데려오며 약점으로 꼽혔던 리시브 라인도 보강했다.



현대건설 선수들은 비시즌 이 감독 지도 아래 단내 나는 훈련을 소화했다. 황연주도 더 독한 마음으로 시즌을 준비했다. “팀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코칭스태프가 합류했고 세터도 바뀌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적응을 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리고 체력적인 부분도 잘 따라가려고 했어요. 그 덕분에 몸도 더 좋아졌어요.”



이어 그는 “제 스스로 베테랑으로서 더욱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베테랑’이라는 수식어가 굉장히 무겁잖아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니까요. 경기가 잘 안 풀릴 때 분위기를 바꿔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하려고 했죠”라고 덧붙였다.



이도희 감독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에게도 새로웠다. 조혜정 전 GS칼텍스 감독과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에 이어 이도희 감독은 프로배구 사상 세 번째 여성 지도자다. 황연주는 “아무래도 섬세한 부분은 있어요. 기분 하나하나를 잘 알아주시죠. 감독님이 선수들을 잘 캐치해주셔서 편해요”라고 웃어보였다.



이다영과의 호흡에 대해서도 전했다. “감독님이 다영이를 워낙 잘 잡아주고 있어서 저는 올려주는 데로 하면 되요. 호흡에 있어서 문제는 전혀 없어요.”




6,000득점도 하고 싶어요



이제는 배구를 한 날보다 할 날이 더 적다는 것을 그 역시도 잘 알고 있다. 황연주는 현재까지 지나온 시간들을 세트로 빗대달라는 질문에 “한 4세트쯤 와 있지 않을까요? 4세트 중반을 넘어 가고 있겠죠”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랬다. 배구를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는 그는 어느새 배구 인생의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사이 함께 코트를 밟았던 많은 이들이 경기장을 떠났다. 2005년 황연주와 함께 프로라는 이름을 단 이들 가운데 여전히 코트 위에 서 있는 건 임명옥(한국도로공사)뿐이다.



많은 선수들을 지켜본 그이기에 황연주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화려한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겠죠. 그런데 제가 오랜 시간 배구를 하면서 느낀 건 지금 당장 경기에 뛰는지 안 뛰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프로니까 잘하는 것 역시 중요 하죠. 하지만 그보다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후배들에게 꾸준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늘 최고의 선수였지만 황연주에게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에 위기가 닥쳤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꾸준한 재활과 훈련으로 다시금 일어섰다. 예전 인터뷰에서 황연주는 “부상은 항상 달고 있는 거니까 핑계가 될 수는 없어요. 어떤 이유를 대봤자 다 핑계만 되는 것 같아요. 잘하다가 언제 슬럼프에 빠지게 될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잘할 수 있는 선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렇죠”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그는 머릿속에서 ‘슬럼프’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있었다. “이제는 슬럼프가 오고 안 오고도 없는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고요. 잘 되는 날이 있으면 안 되는 날도 있잖아요. 공격이 잘 안 풀릴 때면 ‘수비 한 번 더 해야지, 서브라도 잘 때려서 상대 리시브를 흔들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왜 이게 안 되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스트레스는 받아요.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솔직히 그 많은 시즌을 뛰었는데 그동안 굴곡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서 이제는 잘 안될 때도 슬럼프라고 생각 하지 않고 다른 부분에 집중하려고 해요.”



묵묵히 걸어왔더니 어느새 도달한 5,000득점. 그에게 넌지시 6,000득점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황연주는 덤덤히 “그러고 싶어요”라고 했다. 이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모르겠어요. 꾸준히 하다 보면 다른 기록도 세울 수 있겠죠. 그런데 ‘이번에는 5,500득점 해야겠다’ 하지는 않아요. 팀이 잘하고 제가 경기에 나서다 보면 기록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록에 대한 욕심을 가지기보다 한 경기 한 경기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잘했다는 얘기보다는 꾸준하게 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황연주. 마지막으로 그동안 수고했고, 앞으로 더 수고할 자신에게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동안 꾸준히 잘해왔어. 아직 조금 더 남았잖아. 좀 더 힘냈으면 좋겠어.” 황연주의 얼굴에 미소가 비쳤다.



글/ 정고은 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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