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지 이전은 도약 노린 승부수, KB손해보험의 의정부 개척기
- 매거진 / 정고은 / 2017-12-22 00:11:00
더 좋은 시장,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나서는 일은 어쩌면 인간과 조직의 본능에 속한다. 더 나은 생존을 위해서다. 대신 그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실패로 돌아가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프로스포츠 영역에서 단행하는 프랜차이즈 이전 역시 모험에 가까운 승부수다. 정든 팬을 등지고, 새로운 팬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일련의 과정. 상인들의 시장개척이나 다름없다.
KB손해보험은 지난 시즌이 끝나자 경북 구미를 떠나기로 하고 새 보금자리 찾기에 나섰다. 결국 지난 7월 경기 북부에 위치한 의정부시에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됐다. 연고지 이전을 결정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KB손해보험의 ‘의정부 개척기’를 이영수 KB손해보험 사무국장과 안종성 의정부시 체육과 정책팀장 이야기를 통해 들어본다.
구미에서 의정부로 오기까지
KB손해보험이 지난 7월 연고지를 구미에서 의정부로 이전한다고 발표하자 즉각 구미에서 반발했다. 불매운동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래도 KB손해보험은 주저하지 않았다. 구미에 오랜 시간 머물렀지만 더 나은 변화를 위해 단행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장기간 부진했던 성적 탓에 감독, 프런트 교체와 더불어 연고지 이전까지 추진하는 승부수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
수원에 숙소를 두고 있는 KB손해보험이 홈구장 구미까지 가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원정 아닌 원정을 다녀야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KB손해보험은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루 전에 구미로 내려가야만 했다. 연고지 이전은 이와 같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교통 문제, 인구, 편의시설 등 이것저것 따져봐야 할 것이 많았다. 이를 위해 구단 사무국은 여러 후보지를 선정해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렇게 고심하던 차에 가장 적극적인 신호를 보낸 것이 의정부시였다.
불모지를 개척하다
의정부는 그야말로 스포츠 불모지로 남았다. 의정부를 비롯한 경기 북동부 지역은 지난해까지 프로 스포츠가 와서 자리 잡은 경험이 없는 도시다. 과거 ‘SBS 농구단’이 의정부 체육관을 1년 여 대여해서 썼을 뿐이다.
좀처럼 체육 행사가 열리지 않았으니 체육관 시설 역시 낙후된 상황. 처음 이 곳에 실사를 나왔을 때 경기를 펼치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 수준이었다고 구단 관계자는 밝혔다. 또 의정부 체육관은 핸드볼 팀 두산이 2018년 3월까지 연습장으로 활용하는 계약이 되어있었다. 여러모로 제약이 많은 상황이었다. 이영수 국장은 “구단 측이나 한국배구연맹(KOVO) 직원이 와서 본 결과 ‘이 곳은 힘들겠다’라고 생각했다. 프로 스포츠가 열리기에는 확실히 부족한 곳이었다”라며 그 때를 떠올렸다.
교통 역시 문제가 됐다. 서울 북부 쪽에 위치해 접근성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의정부 체육관 자체도 진입로가 좁아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지도 고민인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구단은 의정부가 가진 잠재력에 모험을 걸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스포츠 구단이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은 곧 시민들이 ‘스포츠 구단’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주변에 이렇다 할 프로 스포츠가 없어 잘 운영한다면 의정부를 넘어 양주, 포천, 남양주 등 지역 시민들까지도 팬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무엇보다 의정부시 측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임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체육관 시설 문제도 의정부시에서 ‘개막전에 맞춰 준비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전 결정에서부터 개막까지 남은 시간은 약 4개월. 많은 것을 해내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KB손해보험은 그들을 믿고 새로 의정부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KB와 의정부 시청의 협업은 연고지 이전 모델
짧은 시간동안 모든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단과 지역구, 시설관리공단과 운영대행사까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쳐야 가능했다.
다행히 의정부와 KB손해보험 구단과는 뜻이 같았다. 의정부시는 작년 10월 체육과 부서를 신설했다. 그들은 ‘시민들에 제공할 수 있는 최고 복지는 스포츠’라는 명목 하에 프로 구단이 의정부에 발 내릴 수 있도록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거쳤다. KB손해보험 역시 마찬가지. ‘우리 구단’처럼 여겨줄 팬들이 있는 곳을 바랐고 의정부라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의정부에서는 ‘대관료 무상 지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대신 홈 경기장 유료 관중 수입 중 일부만 받기로 했다. 그 외 나머지는 시청이 지원하는 형식으로 연고지 이전 협상에 합의했다. 의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KB손해보험과 손잡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정부체육관은 현재 KB손해보험이 오기 전과 비교하면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뀌었다. 허름하고 낡았던 시설이 순식간에 아기자기한 형태로 탈바꿈했다. KB손해보험 팀 컬러인 노란색을 활용해 외관과 내부를 꾸몄다. 과거 체육관을 다녀가본 관중들은 홈 개막전때 목격한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교통 문제도 나름 해결책을 찾았다. 체육관 진입로가 좁다는 단점을 하루아침에 고칠 순 없다. 이에 의정부시는 ‘대중교통 확대’ 대안을 제시했다. 자가용 차량이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기 시간 약 2시간 전후로 의정부체육관으로 향하는 시내버스 배차 간격을 5분으로 줄였다. 한때 셔틀버스도 고려했지만 이는 지역 경제와 운수업체의 상생을 위해 포기했다. 구단과 시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 나온 결과다.
이영수 국장은 “경기가 열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던 경기장에서 벌써 한 달 이상 보냈다. 단기간에 의정부로 이전하기까지는 시청 공무원 도움 없인 불가능했다. 정말 적극적으로 구단 입장에서 생각해준다. 이것이 우리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 조명, 난방, 각종 편의시설 등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이는 차츰 해결할 문제다. 이 역시 의정부시와 협력하기 위해 논의 중에 있다. 구장을 옮긴 지 이제 첫 해다. 차츰 더 좋아진 경기장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의정부를 넘어서 더 멀리
KB손해보험은 고정 팬 확보 방안으로 ‘학생층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지역구 내 초중고, 대학생 팬들을 KB손해보험 팬으로 만들어 점차 팬층을 넓혀가겠다는 계획이다. 문화 콘텐츠 파급력이 큰 10대와 20대가 KB 배구를 즐긴다면 장차 더 많은 팬들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KB손해보험은 의정부를 넘어 동두천, 남양주, 포천 등에 이르는 경기 북부를 기반으로 저변을 확장할 계획도 함께 밝혔다. 의정부 뿐 아니라 경기 북부 전체가 문화,여가 생활을 누리기에 주변 환경이 충분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을 KB손해보험 팬으로 흡수할 수만 있다면 구단 차원을 넘어 경기 북부에 ‘배구’가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르지만 벌써부터 주변에서 반응이 있다. 지난 10월 15일 개막전 당시에도 의정부 밖에서 찾아온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그 결과 개막전 티켓 5,372장이 모두 팔렸다. 10월 18일, 현대캐피탈과 경기에 찾은 양주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 이야기도 전했다. 그 날 이후 KB손해보험 열성 팬이 된 네 친구들은 곧장 서포터즈에 가입, 그 이후 KB손해보험 전 경기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팬들이 늘어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점”이라고 이영수 국장이 말했다.
KB손해보험은 이를 위해 선수들이 학교를 직접 방문해 경기를 알리고 팬 미팅 형식 행사를 갖는 ‘스쿨어택’, 수능을 치른 학생들을 위한 수험생 무료 입장 이벤트, KOVO에서 강조하는 유소년 배구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고 있다. 이 부분 역시 지역사회와 협조가 필요한 상황. 의정부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의정부시는 주변 여러 학교에 공문을 보내는 등 행정적인 부분에서 힘을 보탠다. 단순히 금전적 지원을 넘어 행정서비스 제공에도 앞장서는 모습이다.
이런 노력은 의정부가 이번 2017~2018 도드람 V-리그 올스타전을 유치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안종성 의정부시 체육팀장은 “의정부시 전체가 관심을 쏟은 결과 올스타전까지 이곳에서 치를 수 있게 됐다. 올해가 첫 해이니만큼 체육관에 많은 걸 준비하진 못했다. 앞으로 더 갖춰 나갈 수 있게 지원을 계속 할 계획이다. 의정부시를 넘어 다른 도시에서도 기분 좋게 이곳을 찾을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KB손해보험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곧 의정부시민들을 위한 것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좋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시 차원에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국장은 “비록 KB손해보험이 ‘의정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이를 넘어 경기 북부를 아우르는 팬들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꽤 반응이 좋다. 시즌 초 홈경기부터 많은 외부 팬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이들 뿐 아니라 경기 북부 시민들이 KB손해보험을 ‘우리 구단’이라고 느낄 수 있게 앞으로 더 많은 준비를 하겠다. 이 곳에서 ‘열혈 팬’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의정부 연착륙, 선수단 전력에도 긍정 효과
연고 이전 효과는 선수단에도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가장 먼저 선수단 반응이 좋다. 숙소인 수원부터 의정부까지는 약 한 시간. 1박 2일 홈경기 일정이 당일치기로 바뀌어 피로감이 덜해졌다. 권순찬 KB손해보험 감독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던졌다. “확실히 이동 거리가 줄어 나를 비롯한 선수들 만족감이 크다. 가장 큰 부분이다.”
지역구 시민들 반응도 좋다. 관객 수도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여기저기서 경기장을 찾기 위한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의정부시 내부에도 좋은 평가들이 잇따르고 있다는 게 안종성 팀장 이야기였다. “프로 스포츠가 열리니 시 분위기 자체가 활기를 갖게 됐다. 이것이 시민들을 결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어 뿌듯하다. 또 ‘의정부’라는 브랜드 인지도를 전국에 알리고 있다. 거기에 KB손해보험 초반 성적도 나쁘지 않아 여러모로 긍정적이다.”
이영수 국장은 “아직 알리는 단계”라며 겸손을 잃지 않았다. “올 시즌은 (연고지를) 옮긴 뒤 첫 시즌이다. 여기서 우리가 활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려 탄탄한 팬층을 만드는 게 첫 번째 목표다. 이어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의정부시와 협력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겠다. 구단과 지역구가 협력 관계를 좋게 유지한다면 앞으로 시민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글/ 이광준 기자
사진/ 신승규 기자, 구단 제공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더스파이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