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행복, 현대건설 엘리자베스
- 매거진 / 정고은 / 2017-12-20 23:55:00
조그마한 얼굴에 길쭉한 팔다리, 여기에 환한 미소까지.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예쁘다”라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만나 얘기해보니 아름다운 마음씨에 더 반해버렸다.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온지 4개월째, 현대건설 여자배구단 소속 엘리자베스(23)는 벌써 김치왕만두와 육개장을 좋아할 만큼 한국생활에 푹 빠져버렸다. 올 시즌 현대건설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11월 15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현대건설 체육관에서 만났다.
꿈에 그리던 V-리그, 지금이 너무 좋아요
지난 5월 12일 서울 앰배서더장충호텔에서 열렸던 여자부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당시. 단상에 올라간 현대건설 이도희 감독은 전체 5순위로 엘리자베스(미국) 이름을 불렀다. 예상을 뒤엎은 선택에 주변이 잠깐 술렁거렸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사전 선호도 조사에서 그리 높은 순위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간절함과 적극성을 보인 게 이도희 감독 눈에 들어왔다.
“공수가 다 되는 선수를 찾던 중에 엘리자베스를 선택하게 됐다. 신장도 괜찮고 다재다능하다. 발도 빠르고 타점도 좋고 힘도 괜찮다. 성격과 인성도 괜찮아 보였다. 표정도 밝고 적극적이다.”
엘리자베스는 팀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이도희 감독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11월 27일 기준 득점과 공격 종합 부문에서 각 2위, 4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리시브와 수비에서도 각 4위, 9위를 기록하고 있다. 공수 양면에서 공헌도가 높다. 그의 활약 속에 현대건설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제가 성장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더 나은 리그로 가고 싶었어요. 한국리그가 힘들다고 들었지만 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고 싶었죠.
말로만 듣던 한국리그를 직접 경험해 보니 어때요?
힘들어요. 어느 한 팀도 이기기 쉬운 팀이 없어요. 매 경기가 쉽지 않죠. 그리고 수비가 좋아요. 여기에 자기 몸을 생각하기보다는 볼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지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모습을 본 지 오래됐거든요.
다른 팀 선수 가운데 인상 깊은 선수가 있나요.
GS칼텍스 강소휘 선수요. 발랄한데 또 어떤 볼이든 다 때리더라고요. 한국도로공사 임명옥 선수도 인상 깊었어요. 그날 경기에서 자기 볼이 아니어도 다 커버하더라고요. 아무리 세게 때려도, 페인트를 해도 다 받았어요. 엄청 잘했어요.
시즌 초반이기는 하지만 팀 성적이 좋아요.
너무 기분이 좋고 행복해요. 그렇지만 시즌은 길고 성적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선수들이 건강하게 시즌을 마치는 것이에요.
현대건설 자랑을 해준다면요.
감독님부터 트레이너까지 모두 다 함께 즐기면서 하는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코치님들도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주죠. 베테랑 선수들은 제 롤모델이기도 해요. 어린 선수들도 저를 잘 도와주고요. 가족 같은 느낌이랄까요. 구단 관계자분들도 잘 챙겨주시고 팬들도 많이 와주시고 모든 것이 다 너무 좋아요.
자신을 제외하고 우리 팀 최고 미녀를 꼽아줄 수 있나요?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이)다영이가 귀여워요. 그리고 한유미 선수도 너무 예쁘죠. 그런데 두 선수뿐만 아니라 다들 너무 예쁘고 착해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이도희 감독은 어때요?
대학 때도 여성 감독님 밑에서 배운 적이 있어요. 그런데 성(性)을 떠나 마음씨가 무척 따뜻한 분이에요.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감독님이 선수 출신이라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감독님이 본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요?
스마일! 그리고 모든 볼을 맞추지 말고 때리라는 말을 많이 하세요. 아! 릴렉스(Relax). 이 말을 가장 많이 하십니다.
한국이 훈련량이 많다고들 하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어떤가요.
스위스랑 훈련 스케줄은 비슷해요. 그런데 그 강도가 다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웨이트나 볼운동을 할 때 보면 더 집중해야 하고 힘들어요. 하지만 전 그런 방식이 더 좋아요. 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처음 왔을 때보다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전에도 지금처럼 주 공격수로 뛰었던 경험이 있나요?
스위스에 있을 때는 내가 볼을 많이 받는다고 느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니었어요. 이제야 내가 진짜 볼을 많이 받구나 느끼고 있어요.
아무래도 부담감과 책임감이 다를 것 같아요.
압박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지금이 좋아요. 여기 오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고요. 우리 팀을 위해서 더 잘하고 싶어요. 전 부분에서 다 성장해야 하지만 리시브는 더 잘하고 싶어요.
이다영 선수와 호흡은 어때요?
우리는 점차 나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다영이가 엄청 늘었어요. 경기 운영뿐만 아니라 코트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나 다른 선수와의 조합 모두 성장하고 있어요.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가장 기본적인 건 건강한 음식을 먹는 거예요. 식당에서 잘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트레이너들도 제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저한테 엄청 신경을 많이 써주세요. 아! 그리고 스트레칭을 많이 해요.
이모님, 육개장 하나 주세요!
이 선수 외모만 서양인이 아닐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 질문에 ‘김치왕만두’를 또박또박 말한다. 여기에 국 종류는 거의 다 좋아하는 편이라고. “이모님, 육개장 하나 주세요”라고 척척 주문도 한다. 심지어 한국 사람도 호불호가 갈리는 닭발마저 먹는다니. 엘리자베스, 혹시 한국인 아닙니까?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궁금해요.
사실 오기 전에는 그동안 아시아를 가 본적이 없어서 어떤 나라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감도 컸어요. 막상 와보니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서 너무 편하기도 하고요. 사람들도 너무 친절하고 음식도 정말 맛있어요. 평소 밥도 선수들이랑 같이 먹어요. 저는 그게 더 마음에 들어요.
음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해요?
김치왕만두! 그리고 국들은 거의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육개장이요!
(통역 왈 : 완전 한국 입맛이에요)
한국에 와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어른들을 공경하는 문화가 조금은 다른 것 같아요. 아침에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어린 선수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다 챙기더라고요. 이제는 저도 같이 하고 있어요.
(통역 왈 : 전력분석관도 이렇게 도와주는 외국인 선수는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쉬는 날에는 주로 무엇을 하고 지내나요?
대부분은 쉬면서 보내요. 죽전 까페거리에 나가서 바람 쐬기도 하고 쇼핑도 하고요. 그리고 그날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먹고 오기도 하죠. 한국에 와서는 경복궁을 가봤는데 너무 예뻤어요. 그날 날씨도 무척 좋았고요. 제가 바다나 해변을 좋아하는데 제주도가 너무 예쁘다고 들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국사람들은 노래방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노래를 잘 부르지는 않지만 함께 노래방을 가서 그런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요.
숙소에서 단체생활하고 있죠. 어려운 점은 없나요?
사실 이렇게 체육관, 웨이트장, 식당 등 모든 시설이 한 군데에 모여 있는 숙소생활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불편함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너무 편해요. 다른 외국처럼 제가 음식을 할 필요도 없고 체육관을 가기 위해 운전을 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죠.
혹시 기억에 남는 팬이나 선물이 있나요?
저희 팀은 정말 좋은 팬들이 많아요. 그래도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팬들도 있죠. 우선 팬미팅에서 처음 본 아저씨 팬이 있는데 저한테 엄청 좋은 선물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저희 엄마랑 언니가 한국에 왔을 때도 선물을 챙겨주셨어요. 그리고 애기 두 명이 있는데 제 사진에 ‘네가 최고야’라고 적힌 머그컵을 선물해준 적이 있어요. 어피치(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이름) 인형을 주신 분도 기억이 나네요! 인형하고 편지를 같이 주셨어요. 이 세 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국말 중에 아는 말이 있다면요?
요새 몸에 대해 배우고 있어요. 머리, 눈, 코, 입, 등요. 아! 그리고 이 말도 할 수 있어요. 이모님, 육개장 하나 주세요(웃음).
최고 선수가 될 거예요!
1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인터뷰. 그 시간동안 많이도 웃었다. 아마 엘리자베스 성격이 유쾌했던 덕분이었으리라. 엘리자베스는 시종일관 쾌활한 미소와 함께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그가 배구를 좋아하게 됐는지 이해가 됐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 속에서도 한 점 한 점 점수를 낼 때마다 서로를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배구만의 분위기가 엘리자베스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배구는 언제 시작하게 됐어요?
12살 때요. 그 전에도 여러가지 운동을 했어요. 부모님이 여름 방학 때면 다양한 활동을 하게 해주시려고 골프, 배구, 농구같은 운동을 하게 하셨죠. 그러다가 배구를 하게 됐어요. 원래 그 당시 농구와 배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두 개를 같이 하는 게 힘이 들더라고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저는 배구의 분위기가 훨씬 마음에 들었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배구만의 매력이 있다면요.
다른 스포츠와 비교하면 매 득점마다 서로 하이파이브도 하고 응원하고 그런 게 있잖아요. 팀 간에 케미스트리(chemistry)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좋아요.
처음 포지션도 윙스파이커였나요?
미들블로커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대학교 때는 아포짓스파이커도 했죠. 프로에 와서 윙스파이커로 정착했어요. 저는 윙스파이커가 좋아요. 조금 더 공을 만질 수도 있고 리시브 하는 것도 좋아요.
배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고등학교 때 콜로라도주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던 적이 있어요. 전승으로 우승했던 거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너무나 좋았던 순간들이 많아서… 그래도 굳이 꼽자면 첫 경기였던 KGC인삼공사전이요. 저희가 원하던 대로 모두 풀리지는 않았지만 힘들게 이겼던 만큼 더 좋았고 시작을 잘할 수 있었어요.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있나요?
엄마요. 제 꿈이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건데 그건 엄마의 꿈이기도 하죠. 지금 달고 있는 등번호 17번도 엄마와 관련된 숫자예요. 엄마 생신이 4월 17일이거든요. 저희 가족 행운의 숫자예요. 그동안 배구를 하면서 14번이나 17번을 달았어요. 저희 언니가 축구를 했는데 언니도 14번을 달고 뛰었죠.
배구를 하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배구 하는 것도요. 올 시즌에는 우승만 보고 가려고 해요. 제가 상을 받거나 하는 개인적인 부분은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런 것보다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해서 팀이 승리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저한테는 우리 팀이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마지막으로 동료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항상 나를 지도해주고 이끌어주고 나를 북돋아줘서 고마워. 코트에서 세리머니 할 때 같이 환호해주는 순간들이 나를 항상 힘나게 해. 훈련할 때는 열심히 하면서 또 그 안에서 배구를 즐기는 모습들을 보면 나 역시도 더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해. 너네들 덕분에 한국에서 생활이 너무 즐거워. 같이 경기하는 것도 너무 좋아. 앞으로도 계속 너희와 함께 하고 싶어.
글/ 정고은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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