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꽃길 위 그녀, 흥국생명 한지현
- 매거진 / 최원영 / 2017-01-23 14:40:00
고생 길만 걷다 드디어 ‘꽃길’로 접어든 한지현. 시작은 수련선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흙길에서 시작된 여정
흥국생명 주전 리베로 한지현. 2012~2013시즌 신인드래프트에서 그녀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어떡하나 싶었어요. 허탈함이 오고 나서는 막막했어요. 지금까지 배구밖에 안 했는데 말이죠. 드래프트 끝나고 나서 한 시간 동안 울었어요. 엄마는 괜찮다고 하는데 속상해 하시는 게 보이더라고요. 너무 죄송했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한지현은 한 달 가량 지난 2012년 12월, 흥국생명 수련선수로 극적인 프로 행을 결정지었다. “드래프트에서 떨어지고 난 후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시간이 남으니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속상한 마음을 달랬죠.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온 거예요. 당시 흥국생명 팀을 맡으셨던 류화석 전 감독께서 직접 연락을 주셨어요. ‘팀에 네가 필요하니 오지 않겠느냐’고요. 잘못 들은 줄 알고 ‘저요?’ 그랬어요. 그때는 이미 마음 정리를 한 상황이어서 너무 당황스러웠거든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했더니 3일 주시더라고요.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정말 기뻐하셨어요.”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달성했지만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론 저 혼자 뒤늦게 합류하는 거니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일 밑에서 시작해야 하잖아요.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됐어요. 처음엔 좀 어색했죠. 드래프트에서 뽑힌 동기들은 이미 적응을 마쳤는데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많아서요. 그래도 동기들이 열심히 도와줬어요. 1년 차이인 세터 (조)송화 언니가 일신여상 선배거든요. 언니에게 정말 많이 의지했죠.”
수련선수로서 가장 힘든 것은 자책감이었다. 그럴수록 한지현은 정신을 무장했다. “생활이나 훈련은 다 똑같았어요. 그런데 제가 ‘나는 수련선수니까’라고 저를 낮추게 되더라고요. 자꾸 동기들과 비교하고요. 극복하기 위해 운동할 때만큼은 실력으로 뒤지지 않으려 했어요. 언젠가는 ‘얘는 수련선수지만 1, 2라운드 애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보여줄 수 있는 게 운동 밖에 없더라고요. 연습하면서 이겨냈어요. 독하게 하기 보다는 즐겁게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이 즐겁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못 이긴다고 했거든요.”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사실 한지현은 세터 출신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리베로로 전향했다. 작은 신장(169cm) 때문이었다. “세터 포지션을 너무 좋아했어요. 키만 컸으면 세터했을 텐데 아쉬워요. 힘들어도 그만큼 뿌듯함이 있는 포지션이거든요. 그래도 리베로가 된 걸 후회하진 않아요. 수비하는 것도 워낙 좋아해서요. 다만 리베로 경험이 짧아서 리시브가 약한 게 흠이에요. 그 약점이 많이 힘들죠. 어려운 볼 연결은 다른 선수들보다 잘할 수 있지만요.”
리시브를 잘하기 위해 한지현은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타고난 감각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훈련밖에 방법이 없어요. 리시브는 심리적인 부분이 반 이상을 차지해요. 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요. 자신감이 없으면 아무리 훈련해도 안 돼요. 일단 상대방이 서브 넣을 때 지고 들어가니까요. 그래서 가끔 경기할 때 속으로 ‘그래 때려봐라. 내가 제일 잘하고, 건방지다’ 이렇게 주문을 외워요.”
가장 리시브 하기 까다로운 서브는 누구 것일까? “GS칼텍스 표승주 언니나 도로공사 고예림이요. 저희 팀 송화 언니 서브도 진짜 어려워요. 각 팀에 한 명씩은 다 있어요. 회전이 없고 공 움직임이 심한 서브가 받기 힘들어요. 공이 뚝 떨어져서 낙하 지점을 알 수 없거든요. 오히려 강한 스파이크 서브가 받기 수월하기도 해요.”
발목 부상이 말 그대로 발목을 잡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양쪽 발목이 안 좋았어요. 인대가 거의 다 늘어나서 없다고 해요. 어느 병원에 가도 수술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파도 참는 게 버릇이 됐어요. 지금은 약 먹고 재활이나 보강운동을 많이 해요. 훈련하다 보면 집중하니까 아픈 걸 잊어요. 끝나면 다시 엄청 아프죠. 그래도 괜찮아요.”
힘들 때마다 손 잡아준 박미희 감독
배구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분명 있었다. 한지현을 잡아준 건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이었다. “비시즌에 재계약 할 때 감독께서 한 명씩 불러서 면담을 하셨어요. 그때 제게 선후배, 수련선수 등을 떠나서 선수들을 똑같은 출발선에 놓고 편견 없이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오직 실력으로만 판단하시겠다고요.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는 뜻이잖아요. 그때 이 악물고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죠.”
상대에게 서브 득점을 내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미희 감독은 한지현에게 끝없는 신뢰를 보냈다. “예전에는 리시브 실수하면 벤치를 보며 벌벌 떨었어요. 지금은 감독께서 ‘뭐라고 안 할 테니 실수하고 나 보지마’라고 하시더라고요. 항상 저에게 ‘너 이거 왜 못 해’가 아니라 ‘괜찮아, 잘하고 있어. 자신감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세요. 기술적인 부분은 얘기하시지 않고 무한 긍정을 심어주시죠. 선생님들이나 언니들이 저를 많이 배려해줬어요.”
한지현은 박미희 감독을 ‘당근과 채찍을 잘 사용하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칭찬도 잘해주시는데 꾸중도 잘하세요(웃음). 선수들에게 화를 많이 내시는 편은 아니에요. ‘너 내가 이런 실수하지 말랬지!’라며 장난으로 손목 때리고 그러세요. ‘다음에 또 때릴 거야!’라고 하시면서요. 그러면 선수들이 잘하겠다고 웃으면서 빌어요. 김태종 수석코치님도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세요. 팀이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죠.”
나를 보며 희망 가졌으면
올 시즌 주전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힌 한지현. 하지만 시즌 시작 전 흥국생명은 ‘리베로가 약하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올 시즌 잘 치러서 다음 시즌에 그 말만은 안 나오게 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수비 좋은 팀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었어요. 공격수는 워낙 좋잖아요.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팀을 잘 받쳐주는 리베로가 되고 싶었죠. 그래서 열심히 했어요.”
흥국생명이 전반기 선두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조직력’이었다. “윙스파이커 (신)연경이가 공격수지만 저를 정말 많이 도와줘요. 제2 리베로라고 할 정도예요. 입단 동기인데 멘탈 코치처럼 저를 붙잡아줘요. 경기 중에 흔들릴 때면 송화 언니까지 셋이서 무너지면 안 된다고, 버텨야 한다고 얘기해요.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힘내자고요.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니 힘이 생겨요. 제 리시브가 안 좋아도 러브나 (이)재영이가 볼을 잘 처리해주니 고마워요. 다 팀원들 덕분이죠. 우리 팀은 서로 의지를 많이 해요. ‘나 오늘 좀 안 되는데 옆에서 도와줘.’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해요. 코트에서 자존심이 어디 있어요. 이기고 봐야죠.”
한지현에겐 롤모델이 두 명 있다. “고등학교 때 리베로 시작하면서부터 쭉 여오현(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 최부식(대한항공 코치) 선수가 롤모델이었어요. 두 분 모두 코트에서 분위기메이커로서 보이지 않는 주장 역할을 하시더라고요. 누구보다 빛났어요. 저는 세터였을 때도 이 두 분을 제일 좋아했거든요. 최부식 코치는 은퇴하셔서 아쉬워요. 한 번은 저에게 ‘너만의 루틴을 만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셨어요. ‘오늘은 표승주 언니 서브를 다 받아야겠다, 볼 연결은 무조건 정확히 올리겠다’ 이런 거요. 조언 들어서 좋았어요. 홈 구장(인천계양체육관)이 같아서 경기 끝나거나 들어갈 때 하이파이브 해주시고 파이팅도 외쳐주셔서 감사했어요.”
반대로 라이벌로 생각하는 선수도 있다. “같은 수일여중 출신 노란(IBK기업은행)이요. 고등학교가 갈리면서 자연스럽게 라이벌이 됐어요. 노란이는 수원전산여고, 저는 일신여상에서 리베로가 됐죠. 친구니까 더 지기 싫더라고요. 청소년 대표팀은 항상 노란이가 갔거든요. 프로도 노란이는 정식 라운드에 뽑혔고, 저는 수련선수니까 괜히 더 이기고 싶은 거 있죠? 어렸을 때부터 계속 라이벌이었던 것 같아요.”
한지현은 어느덧 프로생활 다섯 시즌째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데뷔전(2012년 12월 16일 IBK기업은행 전)이죠. 팀에 들어와 일주일 만에 등록선수로 전환돼 바로 경기를 뛰었거든요. 올 시즌도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2013~2014시즌에 주전으로 한 시즌을 다 소화했는데 그땐 너무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김)혜선 언니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뛴 거라서요. 좋은 기회였는데 잡지도 못 하고 그냥 날려버렸죠. 힘들어서 매일 울었어요.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했어요. 흔들리기도 하지만 팀에서 믿고 기다려줬으니 보답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한지현은 수련선수로 꿈을 키우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수련선수라는 열등감에 자기를 낮추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해봤기 때문에 그게 너무 힘들다는 걸 알거든요. 묵묵히 훈련해서 실력으로 보여주고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기회가 와요. 포기하지 말고 기회를 잘 잡아내길 바라요.”
SIDE INTERVIEW
프로 데뷔 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본다면.
“보는 눈이 좋아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무턱대고 넘어졌어요. 공만 보고 뛰어다니니 수비수끼리 자리가 겹치는 경우도 많았고요. 이제는 저희 팀 블로킹이나 빈 코스도 보여요. 여유가 조금 생겼다고 할까요? 그래도 아직은 모자라죠. 올 시즌 끝나면 꼭 100점짜리 선수가 되고 싶어요.”
한지현에게 배구란?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배구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힘든 것도 다 잊어버릴 정도로요. 이제는 배구가 제 인생이고 꿈이에요. 이걸로 꼭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고 싶어요. 배구는 알면 알수록 어려운데 또 재미있어요. 포기하면 정말 후회할 것 같은 너무 소중한 존재죠. 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할 거예요.”
한지현에게 성공이란?
“프로선수가 됐다고 끝은 아니에요. 같이 배구했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선수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어요. ‘얘 진짜 잘하는 선수야. 수비가 좋은 선수지’라고요.”
마지막으로 한지현에게 팬이란?
“활력소죠. 경기에서 지든 이기든 수고했다고 박수 쳐주시는 분들이에요. 제가 뭘 하지 않아도 안부 물어주시고요. 정말 감사한 게 제가 경기를 못 뛸 때도 몇 년간 곁에서 조용히 응원해주셨어요. 무조건적인 내 편이라는 생각에 든든하고 힘이 나요. 부족한 선수지만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더 나은 경기력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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