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흘러 ‘전설’에서 ‘엄마’로, 호남정유 언니들의 스파이크
- 여자프로배구 / 최원영 / 2017-01-07 02:11:00
[더스파이크=장충/최원영 기자]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 그 자체가 자부심이고 자랑이다.” 오랜만에 코트 위에서 기지개를 켠 선수들이 남긴 말이다.
GS칼텍스의 전신인 호남정유, LG정유 선수들이 6일 장충체육관에 모였다. GS칼텍스와 IBK기업은행의 V-리그 경기에 앞서 오후 3시부터 스페셜 매치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서울V컵 2016’ 남자부 준우승 팀인 고려대였다. 경기는 9인제에 매 세트 21점으로 진행됐다.
체육관에 이도희, 박수정, 장윤희, 홍지연, 김연심, 이미정, 김성민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와일드 카드로 지난 시즌까지 GS칼텍스에서 뛰었던 김지수와 안혜리도 힘을 보탰다. 선수들은 경기 전 코트 한 켠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회포를 풀었다.
90년대를 주름 잡았던 이들이 다시 코트 위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경기였다. 과거 호남정유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다. 1990년 11월부터 1995년 1월 3일 선경에 세트스코어 1-3으로 패할 때까지 무려 4년 2개월 동안 92연승 신화를 썼다.
대통령배, 슈퍼리그를 포함해 1999년까지 9연패라는 위업도 달성했다. 레프트 장윤희와 정선혜, 세터 이도희, 센터 홍지연, 라이트 박수정 등 선수들 면면이 화려했다. ‘돌아온 언니들’은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김철용 감독도 큰 소리로 작전을 지시하며 향수에 젖었다.
20대 젊은 피인 고려대 팀을 상대로 첫 세트부터 확실히 기선제압에 나섰다.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사뭇 진지했으나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너 점프가 예전 같지 않아’, ‘나 힘드니까 빨리 끝내자’, ‘이제 안경 써야겠다’ 등 농담이 오갔다. 결국 이들은 세트스코어 2-1(21-8, 21-12, 18-21)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경기 후 기념 촬영에는 반가운 얼굴이 한 명 더 합류했다. IBK기업은행 이정철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과거 호남정유에서 4년 동안(1994~1997) 코치로 함께했다. 사진 촬영을 준비하던 장윤희가 이정철 감독을 발견하고는 넉살 좋게 코트로 이끌었다. 분위기는 한층 더 훈훈해졌다.
선수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먼저 장윤희는 “지난해 5월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한 뒤로는 오랜만이다. 정말 설렜다. (김)지수와 (안)혜리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더라. 우리랑 뛰려니 긴장되지 않았겠나.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애들도 마음껏 경기를 뛰어 보기 좋았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홍지연도 “코트에 들어가면 흥분된다. 안양시에서 도민체전 등 대회를 나가며 꾸준히 몸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이번엔 뭔가 특별했다”라며 미소 지었다.
(이도희 SBS 스포츠 해설위원은 스페셜 매치 직후 열린 GS칼텍스-IBK기업은행 경기 중계를 준비하느라 촬영에 함께하지 못 했다.)
어느덧 이들도 평범한 가정의 ‘엄마’가 됐다. 2세들도 대부분 배구를 한다고. 홍지연은 중학교 1학년생인 딸과 초등학교 2학년생 아들을 뒀다. 특히 딸은 키가 벌써 183cm라고 한다. 김성민 아들은 화성 남양초 5학년에 재학 중이다. “잘 하는 것 같긴 한데 아직 키가 작다”라는 설명이다.
이도희 둘째도 초등학생 때부터 배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도희는 ‘얘는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해설위원답게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을 유지했다. “본인이 너무 원하니 중학생 때까지 운동을 시켰다. 결국 포기하더라. 애초에 문성민(현대캐피탈)같은 선수가 될 것 같지 않았다”라며 크게 웃었다. 장윤희 딸은 중앙여고 1학년생으로 세터의 길을 걷고 있다. 장윤희는 “엄마를 닮아 점프가 좋다”라고 자랑했다.
배구공을 잡는 것은 허락했으나 엄마로서, 선배로서 걱정도 컸다.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기에 안고 가야 하는 편견이 보였다. 장윤희는 딸에게 “엄마 때문에 네가 더 힘들고 골치 아플 것 같다. 노력으로 증명하고, 실력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라고 전했다. 김성민 또한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겸손해야 한다. 절대 자만해선 안 된다”라고 수시로 교육했다.
홍지연도 딸에게 “난 많이 즐기면서 하지 못해 후회가 됐다. 너는 배구를 재미있게 했으면 한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견디게 된다.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할 것이다”라며 조언했다.
그렇게 인터뷰까지 모든 일정을 마쳤다. 경기장을 떠나려는 발걸음에는 아쉬움이 담겼다. 선수들은 “우리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지수, 혜리처럼 딸 같은 후배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고 싶다. 환갑까지 말이다(웃음). GS칼텍스 OB모임을 잘 유지해 선후배 관계가 돈독해졌으면 한다”라며 한마음으로 입을 모았다.
잠시나마 그때 그 시절을 만날 수 있어 반가운 시간이었다.
사진/ 장충=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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