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형 윙스파이커, 계보를 말하다
- 매거진 / 최원영 / 2016-12-29 11:31:00
국내 남녀 수비형 윙스파이커 중 대표적인 선수는 누가 있을까? 그 명맥은 어디서부터 시작돼 어디로 흐르고 있는 걸까. 시곗바늘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시간여행을 떠나봤다.
legend
삼성화재 석진욱
지금도 ‘수비형 윙스파이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석진욱(현 OK저축은행 수석코치)이다. 그는 인천 주안초 3학년 때 형을 따라 배구를 시작했다. 이후 인하부고에서 43연승, 한양대에서 51연승을 이끈 뒤 1999년 삼성화재에 입단했다. 무려 77연승을 달 성한 주요 멤버 중 한 명이 됐다. 비교적 작은 신장(186cm)으로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해서는 무언가 강점이 필요했다. 당시 팀에 김세진(현 OK저축은행 감독) 김상우(현 우리카드 감독) 신진식(전 삼성화재 코치) 등 공격력이 좋은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있었다.
이에 석진욱은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거듭나며 이를 극복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수비력을 다졌다. 리베로보다 뛰어난 리시브와 디그를 선보였다. 2007~2008시즌부터 2009~2010시즌까지 세 시즌 연속 리시브 부문 1위는 석진욱 몫이었다. 리베로가 아님에도 리시브 성공률 70~80%를 넘나드는 전설적인 선수였다. 공격은 물론 블로킹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단신인 대신 타이밍을 맞췄다. 점프는 정석대로 하되 상대 공격수가 좋아하는 코스로 손을 뻗어 막아냈다.
석진욱이 대단한 이유는 또 있다. 부상이 줄곧 따라다녔으나 ‘돌 도사’는 개의치 않았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총 7차례나 수술대에 올랐다. 양쪽 무릎은 아무리 고쳐도 다시 고장 났다. 고질적인 통증으로 인해 오른쪽 어깨 수술도 받았다. 그럼에도 석진욱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술할 때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을 재활에만 매진해야 했다. 공격을 위한 점프가 이뤄지지 않아 힘든 시간도 보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코트로 돌아왔다. 그만큼 성실했으며 배구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원 포인트 리시버’라도 좋으니 경기를 뛰고 싶다고 했고, 주장으로서 삼성화재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그는 2012~2013시즌을 끝으로 ‘선수 석진욱’에게 안녕을 고했다. 이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후배들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롤 모델로 남았다.
present
대한항공 곽승석
곽승석은 부산 가야초에서 처음 배구공을 잡았다. 집에서는 귀한 외동 아들이 배구선수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말렸다. 동래중 진학 후 곽승석은 가족들에게 배구에 대한 자신의 절실함을 알리며 설득에 성공했다. 그는 2010~2011시즌 1라운드 4순위로 대한항공에 지명되며 프로선수가 됐고, 그 해 바로 주전을 꿰찼다. 리시브에선 합격 점을 받았으나 공격력이 다소 모자랐다. 장광균(현 대한항공 코치)과 교대로 투입되며 경험을 쌓았다. 이듬해 그는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완전히 입지를 굳혔다. 프로 원년인 2005년부터 여섯 시즌 동안 삼성화재 여오현(현 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과 석진욱이 독식한 리시브 1위에 곽승석 이름이 새로이 새겨졌다.
2011~2012시즌 처음으로 리베로가 아닌 윙스파이커 곽승석이 수비 1위에 올랐다. 곽승석은 리시브(세트당 5.81개)와 수비(세트당 7.33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수비상을 거머쥐었다. 2013~2014시즌까지 세 시즌 동안 리시브 선두 자리를 지켰다.
리시브 순위 산정 기준이 성공률에서 세트당 평균으로 바뀐 2008~2009시즌부터 현재까지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곽승석이다(2013~2014시즌 세트당 6.71개). 빠른 발이 장점인 그는 퀵오픈 공격이 주 무기다. 날카롭게 상대 코트를 노린다. 시간차와 중앙 후위 공격 등 많은 옵션을 가지고 있다. 2014~2015시즌에는 후위 공격 3개, 서브 3개, 블로킹 6개로 개인 첫 트리플크라운(2015년 3월 9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국내선수로는 2012~2013시즌 김학민(대한항공) 이후 2년 만에 처음이었다. 지난 시즌 후배 정지석에게 주전 자리를 내어주며 하락세를 타는 듯 했으나 이번 시즌 다시 돌아와 완벽히 부활을 알렸다. 공격에서 데뷔 이래로 최다인 점유율 17.4%를 선보이며 코트를 누비고 있다(11월 21일 기준).
OK저축은행 송희채
남자부 막내 구단 OK저축은행이 2014~2015시즌에 이어 지난 시즌까지 챔피언에 오르며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괴물 외인이라 불린 ‘몬스터’ 시몬과 토종 주포 송명근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OK저축은행이 우승할 수 있던 원동력에는 분명 송희채도 있었다. 2013~2014시즌 팀 창단과 동시에 V-리그에 입성한 경기대 3학년생 송희채는 수비형 윙스파이커로서 역할을 부여 받았다.
공격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수비에 중점을 두고 코트에 나서며 시몬과 송명근 뒤를 받쳤다. 그는 지난 세 시즌 동안 정규리그에서 리시브 성공률 64.44%, 61.27%, 59.63%로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송희채가 가진 특유의 배짱이 돋보였다. 그는 강한 서브가 자신에게 집중돼도 ‘다 받아버리겠다’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올 시즌에는 팀 공헌도가 더욱 높아졌다. 새 외국인 선수로 윙스파이커 마르코 보이치가 오면서 오른쪽 날개가 비었다. 더군다나 비 시즌에 수술한 송명근까지 재활로 팀에 복귀하지 못 하며 공격력이 대폭 약화됐다. 시즌 초반 송희채 짐을 덜어줬던 강영준마저 통증이 재발해 전력에서 이탈했다. 결국 중요할 때 한 방을 해결해줄 선수가 없었다. 이에 송희채가 아포짓 스파이커로 변신했다.
본래 오른쪽 공격수는 리시브를 받지 않지만, 송희채는 리시브를 전담하며 공격까지 도맡아 했다. 그간 평균 9.2%였던 공격 점유율은 올 시즌 18.4%로 껑충 뛰었다. 공격 성공률도 53.5%로 우수하다(11월 21일 기준). 다행히 아포짓 스파이커 전병선이 등장해 깜짝 활약을 보태며 송희채는 제 자리인 윙스파이커로 돌아갔다. 그가 공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전력 서재덕
국가대표 아포짓 스파이커이자 국내 V-리그에서는 안정적인 윙스파이커로 자리매김한 카멜레온 같은 선수. 성균관대 시절 오른쪽 공격수로 이름을 날린 서재덕은 2011~2012시즌 프로 진출 후 윙스파이커로 포지션을 바꿨다. 비교적 공격에 더 힘을 쏟던 그는 2013~2014시즌 보조 공격수로 역할이 바뀌었다. 전체 1순위로 루키 전광인이 팀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갖춰놓은 기본기 덕분에 해당 시즌 리시브 전체 2위로 선전했다. 이후 2014~2015시즌에는 리시브와 수비 모두에서 V-리그 최고가 됐고, 2015~2016시즌에도 리시브 1위는 서재덕이 챙겼다.
공격력도 녹슬지 않았다. 올해 열린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에서는 득점(140점), 공격(121점 성공률 51.27%), 서브(세트당 0.36개) 모두 팀 내 1위였다. 한국이 2그룹에 잔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단연 ‘월드리그 스타’ 서재덕 공이 컸다. 소속 팀 한국전력도 올 시즌 초반 기세가 좋다. 돌풍을 일으키며 상위권에 머물렀다(11월 21일 기준 남자부 2위). 바로티 전광인과 함께 서재덕이 삼각편대를 완성했다. 한국전력은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으나 올 시즌만큼은 그 이상을 노려보겠다는 각오다.
future
대한항공 정지석
프로 출범 후 신인 드래프트에서 최초로 고등학생 이름이 불렸다. 2013~2014시즌 2라운드 6순위로 대한항공 선수가 된 정지석이다. 팀 동료 곽승석 밑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그는 지난 시즌 선배를 제치고 주전 한 자리를 담당했다. 수비형 윙스파이커로서 견고한 수비는 물론 빠른 공격에도 강점을 가졌다. 오픈, 퀵오픈, 시간차, 이동 공격 등 다양한 플레이를 소화했다. 가장 큰 무기는 역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스파이크를 꽂는 ‘패기’였다. 2015~2016시즌 정지석은 리시브 2위에 오른 데 이어 수비 1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16~2017시즌을 준비하던 도중 발목을 다쳐 올 시즌에는 자주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앞으로가 기대되는 선수임은 확실하다.
현대캐피탈 허수봉
올 시즌 역대 최초로 드래프트 1라운드에 호명된 고교생 허수봉(3순위)은 이후 대한항공에서 현대캐피탈로 전격 트레이드 됐다(상대 미들 블로커 진성태). 공교롭게도 허수봉은 11월 11일 대한항공 전에서 데뷔하며 최연소 출전 신기록(18세, 223개월 4일)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정지석(223개월 23일)이 가지고 있었다. 입단 당시부터 이목을 끈 그는 197cm로 큰 신장임에도 기대 이상의 수비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은 허수봉을 ‘제2 이경수’로 키울 요량이다. 모두 기대대로 그가 ‘될성부른 나무’로 성장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여자부 수비형 윙스파이커 누가 있을까
1997년 12월 국내에 리베로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수비 전문 선수가 없어 코트 위 모든 선수들이 수비에 가담해야 했다. 때문에 공격형, 수비형 선수가 뚜렷하게 나눠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설로 남은 수비형 윙스파이커를 꼽자면 호남정유 장윤희(현 MBC 해설위원)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170cm로 단신이었던 그녀는 빠른 발과 점프력, 파워 등으로 신장에서 약점을 극복했다. 순발력이 좋아 수비 폭이 넓고, 공수 전환이 잘 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장윤희는 1988년부터 2001년까지 14년 동안 공격 종합 1위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더불어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슈퍼리그 9연패 및 92연승을 이끌었던 주역이다. 수많은 수상 경력이 장윤희를 설명하기도 한다. 슈퍼리그 MVP(5차례)는 따놓은 당상이었으며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 은메달,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은메달 등을 목에 걸었다.
같은 팀에서 뛰었던 정선혜도 있다. 삼양초 졸업 후 성암여중에 진학한 정선혜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코트에 나섰다. 성암여상 2학년 때는 청소년 대표팀에도 발탁되며 이름을 떨쳤다. 1993년 호남정유에 입단해 3개월 만에 성인 국가대표팀에 승선했다. 장윤희와 MVP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정도로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파워는 갖췄지만 점프력은 다소 아쉬웠다. 대신 상대 블로킹을 피해 재빠르게 스파이크를 꽂아 넣는 영리한 선수였다.
최근 여자부에서는 수비형 윙스파이커 개념이 희미해지고 있다. 대부분 팀들이 상대를 흔들기 위해 주 공격수에게 목적타 서브를 넣기 때문이다. 즉, 리시브를 하면서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흥국생명 이재영, GS칼텍스 이소영 등이 있다. 외국인 선수 중에서도 IBK기업은행 리쉘, 현대건설 에밀리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재영은 국내 토종 공격수 중 단연 돋보이는 선수다. 팀에서는 외인 러브와 함께 쌍두마차를 이룬다. 공격에서는 점유율 27.2% 성공률 41.5%를 기록 중이다(이하 11월 21일 기준). 리시브는 점유율 38.3%, 성공률 47.28%로 잘 버티고 있다. 이소영도 마찬가지다. 올 시즌에는 기복을 줄이고 안정감까지 더한 그녀는 공격 점유율 22.9%, 성공률 39.8%를 선보였다. 리시브에서도 점유율 38.4%, 성공률 41.27%로 빠지지 않았다. ‘제2의 장윤희’에 가장 근접한 둘이다.
[SIDE STORY] 이도희 SBS 스포츠 해설위원이 말하는 수비의 중요성
어느 포지션이든 수비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 예를 들어 세터는 세트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렸을 때부터 기본기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 선수들이 공격에만 치중한다. 사실 공격이 훨씬 재미있긴 하다. 다들 수비 훈련은 지루하고 힘들다고 생각한다.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야 참 맛을 느낀다. 그래도 해야 한다. 리시브나 디그 등은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 어렵고도 중요한 기술이다. 처음 배구를 시작할 때부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야 한다. 김연경(페네르바체)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된 밑바탕에는 공격만큼 탄탄한 수비력이 있다는 것을 후배들이 명심했으면 한다.
과거에는 미들 블로커도 리시브를 해야 했기 때문에 후위로 빠졌을 때 상대 서브의 주요 타깃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호남정유 박수정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들 블로커가 주 포지션이지만 아포짓 스파이커도 병행했다. 베스트 디그상을 자주 수상했을 정도로 수비력은 으뜸이었다. 전반적으로 점프력이나 파워보다는 재치와 기술로 승부하는 선수였다. 손목을 쓸 줄 아는 스타일로 당시 ‘포스트 박미희’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공격 수비 세트 블로킹 등 모든 면에서 훌륭했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 KOVO, 구단 제공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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