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여오현의 마지막 목표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죠”
- 매거진 / 박혜성 / 2022-09-06 19:49:12
우리 나이로 이제 45살이 됐다. 프로에서만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한국 배구 레전드로 자리 잡은 여오현. 길었던 시간답게 온라인 플랫폼에서 ‘여오현’을 검색하면 나오는 정보들이 넘쳤다. 그 많은 정보들 중 어디까지가 맞고, 틀린 곳은 무엇인지. 그가 직접 읽어보며 ‘팩트체크’를 했다.
현대캐피탈 여오현은 2000년 성인배구 팀에 입단한 뒤 23시즌을 보냈다. 여오현이 지닌 기록은 화려하다. V-리그 출범 이후 치러진 17번의 챔피언결정전 가운데 14번 출전했다. 그중 9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2015-2016시즌에는 수비 10,000개 성공의 금자탑을 세웠다. 여자부 김해란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기록이고 남자부 최초의 기록이다. 개인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2014-2015, 2015-2016 2시즌 연속 베스트 7에 이름을 올렸다. V-리그가 출범한 첫해 리베로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국가대표로 수많은 국제 대회에 참가해 세계적인 명장들로부터 “뛰어난 선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비시즌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시즌보다 비시즌에 운동량이 더 많습니다. 한창 몸을 올리고 체력을 끌어올리는 중입니다.
평소 이름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요즘은 많이 검색하지 않아요. 그래도 예전에 인터뷰를 자주 했을 때는 어떤 기사가 올라왔는지 찾아봤는데 요즘에는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니까 검색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웃음).
9번의 우승
“저는 복받은 선수입니다”
선수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챔피언결정전에서 승리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챔피언결정전 종료 후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승리한 팀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지만, 패배한 팀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팀 모두 눈물을 흘리지만 의미는 다르다. 모든 선수들이 원하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비시즌 기간부터 엄청난 땀을 흘리며 훈련한다. 하지만 노력하는 모든 이가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는 없는 법. 모든 팀이 그 우승컵을 바라보며 달리지만 왕의 자리는 단 하나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이 있음에도 여오현은 무려 9번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는 여오현이라는 선수가 한국 배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선수임을 증명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V-리그 출범 이후 치러진 17번의 챔피언결정전에서 14번 출전, 9번의 우승. 이 결과에 자부심이 클 것 같은데.
엄청난 자부심이 있죠. 왜냐하면 우승을 못해보고 은퇴를 한 선수들이 많아요. 그리고 주위에서도 “아무리 오래 해도 우승 한 번 하기 힘든데 너는 복받은 선수다”라고 말씀하세요. 저 또한 챔피언결정전 무대에 14번 올랐다는 사실 자체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챔피언결정전은.
삼성화재 시절 현대캐피탈과 7차전까지 갔던 2009-2010시즌 챔피언결정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7차전 5세트까지 가는 치열한 경기였죠. 끝까지 예측할 수 없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현대캐피탈 시절에는 2016-2017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이 기억에 남아요. 이적 후 첫 우승이고 당시 외국인 선수가 부상이었는데 참고 뛰면서 우승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습니다.
대표팀에서도 빛났던 존재
“해외 오퍼도 있었죠”
여오현은 V-리그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리베로였다. 국가대표 명단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그는 국제무대에서도 통할까. 정답은 YES였다. 국제무대에서 여오현의 실력을 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세계적인 명장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 세계에서 통하는 아시아 리베로를 보고 유럽팀들은 여오현을 영입하기 위한 움직임까지 보이며 해외리그 진출이라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면 여오현은 한국배구 역사상 최초로 리베로가 해외 진출에 성공한 사례로 남았을 것이다.
세계적인 명장 베르나르두 헤젠지(브라질) 감독이 “유럽 빅리그에서 바로 뛰어도 될 선수”라고 말한 걸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정말 영광이었죠. 국제무대에서 유명한 감독님께서 관심을 가져준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습니다. 2004년에는 러시아를 포함한 해외의 몇몇 팀에서 이적 제의가 오기도 했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국내 팀이 해외진출을 허락하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지 못했었죠.
2012년 월드리그가 끝난 뒤 대표선수 은퇴를 선언했는데 당시 심정과 후회를 한 적은 없는지.
당시 제가 오랜 기간 대표선수를 해왔고, 후배 선수들이 올라오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만약 그 당시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다면 (대표선수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긴 선수 생활 동안 이적은 딱 한 번 했어요. 하지만 그 한 번이 삼성화재의 라이벌인 현대캐피탈로의 이적입니다. 결심한 이유는.
삼성화재에서 13년 동안 있었고 나이도 있었으니까 변화가 필요했어요. ‘다른 팀 가서도 내가 잘할 수 있나? 우승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에 도전을 택했죠. (당시 주변 반응은?) 많이 의아해 하셨죠. 당시 FA로 이적하면서 주변에서는 '따로 뒷 돈을 받은 것 아니냐'는 말도 많았거든요. 그런 건 정말 절대 없었습니다. 그저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홍익대 공격수 시절
“작으면서 잘 뛰어다녔네요”
현재는 레전드 리베로로 남아있지만 홍익대학교 시절 여오현은 아웃사이드 히터로 활약했다. 175cm로 공격수라 하기엔 작은 키지만 엄청난 점프력으로 상대 코트에 공을 내리 꽂았다. 하지만 당장보다 미래를 내다봤다. 대학 무대에서는 통하지만 실업 무대로 올라가면 무리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리베로로 전향했다. 그 순간의 선택은 여오현의 인생을 바꾼 선택이 됐다.
홍익대 시절 아웃사이드 히터로 활약하던 영상도 화제가 됐는데.
공격보다는 수비형 아웃사이드 히터였죠. 공격수였지만 리시브나 수비 비중이 더 높았어요. 그래도 점프력은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믿고 선발로 투입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당시 저보다 훨씬 키가 큰 김민호 선수가 리베로를 봤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후배라서 그렇게 됐죠. 2학년 때까지 아웃사이더 히터로 뛰다가 3학년 때부터 리베로로 변경했죠.
이후 리베로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미래를 생각한 거죠. ‘대학에서는 통했지만 실업 팀에서 이 키로 공격한다면 통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전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포지션 변경 당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전혀 못했어요. 변경 이후 초반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공격하다가 뒤에서 수비만 하려니까 뭔가 허전하고 위치 잡는 것도 어려웠죠. 그러다 실업팀에서 1~2년 차에 리베로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팬분들도 알아봐 주시면서 더 열심히 했어요. (리베로만의 가장 큰 매력은?) 내 수비를 인해 동료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중요한 순간에 수비를 잘 해서 우리팀이 득점을 하면 내가 경기의 흐름을 바꾼 거잖아요. 그런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여오현’을 검색하면 나오는 정보들을 다 봤습니다. 어땠나요.
재밌는 영상도 보고 어렸을 때도 다시 보니까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됐고 다시 열심히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생겼네요. 정말 좋았고 저를 새롭게 자극하는 즐거운 인터뷰였습니다.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까지도 코로나19로 불편함을 겪고 계실 텐데 몸조심하시고 우리 현대캐피탈 선수들 열심히 시즌 준비하고 있으니까 체육관 많이 찾아오셔서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재밌고 멋진 경기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박혜성 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9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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