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맨’ 김정호, 봄배구로 향하는 문을 열어라
- 매거진 / 송현일 기자 / 2025-07-09 14:20:54
‘작은 거인’ 김정호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유계약선수(FA) 계약을 통해 최근 삼성화재에서 한국전력으로 둥지를 옮긴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팀을 포스트시즌 무대로 이끄는 것. 이적하자마자 구단의 큰 기대와 함께 에이스 역할을 맡게 됐지만 부담은 없다. “꼭 우승을 해보고 싶다”며 뜨거운 의지를 뿜어내고 있는 그를 5월 14일 오산에서 만났다.
김정호가 한국전력으로 향한 배경
“감독님이 직접 찾아오실 줄은…”
붉은색 유니폼도 제법 잘 어울린다.
그동안 삼성화재에서 함께 고생한 동료 선수들, 코칭 스태프들, 감독님, 그리고 팬들에게 감사했다는 말을 먼저 올리고 싶다. FA가 되면서 한국전력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이적할 기회가 생겼다. 합류하게 돼 굉장히 설레는 마음이다. 팀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내 집처럼 편안하고 재밌다. 분위기가 너무 좋다(웃음). 또 (정)민수 형도 얼마 전 KB손해보험에서 한국전력으로 옮겨 오지 않았나. 몇 년 만에 다시 한 팀에서 뛰게 돼 반가웠다. 팀원들과 함께 비시즌 동안 준비를 잘해서 2025-26시즌 꼭 좋은 결과를 내겠다. 그리고 한국전력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이적 첫 시즌 한국전력 팬들에게 어떤 점을 어필하고 싶나) ‘잘하는 선수’로 각인되고 싶다.
한국전력 이적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한데.
가장 먼저 연락이 온 팀은 우리카드였다. 그리고 삼성화재와도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솔직히 당시에는 마음이 좀 흔들렸다. 마지막까지 삼성화재와 재계약을 두고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스로 ‘정체된 것 같다’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서 선수 생활을 해보자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전력의 권영민 감독님이 직접 적극적으로 영입 의사를 밝혀 오셨다. 그래서 ‘그래, 감독님을 믿고 한 번 해보자’는 의지가 굳어졌고, 그렇게 이적을 결심했다. (권영민 감독이 직접 찾아와서 내심 기분 좋았을 것 같은데) 왜 아니겠나(웃음). 감독님이 전화로 먼저 내게 커피 한잔 마시자고 연락하셨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감독님이 그리고 있는 한국전력이라는 팀의 비전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길로 마음이 딱 정해지더라. (한국전력 동료들의 반응은) 우선 단장님부터 과분할 만큼 크게 환영해 주셨고, (신)영석이 형과 (서)재덕 형이 따뜻하게 반겨 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일단 (이)원중 형이 너무 좋아하더라. (이)원중이 형과는 예전부터 워낙 친한 사이다(웃음). 좋은 동료들과 함께 코트 안에서 더 성장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한국전력, 솔직히 마음에 품고 있던 팀 중 하나였나.
가고 싶은 팀을 콕 집어서 미리 정해두진 않았다. 결국 경기에 나서야 하는 선수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을 잘 살려줄 수 있는 팀을 원했다. 권영민 감독님과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런 부분이 많이 충족됐다. 한국전력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하게 그려지더라. 나와 한국전력이라는 팀이 동반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그때부터는 다른 고민 없이 한국전력 이적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님이 우리 집 앞까지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다. 솔직히 감동이었다(웃음).
1980년생인 권영민 감독과는 선수로도 마주친 적 있다.
권영민 감독님이 선수로 뛰는 걸 처음 본 건 내가 중학생 때였다. 당시 현대캐피탈 홈구장에서 볼 리트리버로 활동했는데, 감독님의 플레이를 보고는 ‘와, 어떻게 저렇게 토스를 잘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배구부 형들도 다들 최고라고 엄지척을 보냈다. 진짜 대단한 분이었다(웃음). (V-리그에서 일화는 없나) 내가 V-리그에 처음 왔을 때가 2017-18시즌이다. 감독님과는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다 보니 감히 겸상할 레벨은 안 됐다(웃음). 그런데도 감독님이 “너 신인 때 모습 기억난다”고 얘기해 주셔서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 이야기를 나눈 게 감독님이 직접 집 앞까지 찾아와서 만났을 때인데, 그 자리에서 서로 팀 구성에 관한 말도 했다. 감독님이 내가 팀에 온다는 걸 가정해서 이런저런 구상을 들려주시더라. 절로 믿음이 생길 수밖에. 그날 밤 아내와도 얘기를 나눈 뒤 곧바로 감독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한국전력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지난 시즌 밖에서 본 한국전력은 어땠나.
특히 1라운드 돌풍 행진을 보면서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끈질기게 경기를 치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리시브와 수비도 역시 탄탄하고. 팀 색깔이 확실한 게 한국전력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닌가 싶다. (서)재덕이 형도 있고, 특히 (신)영석이 형이 가운데서 확실하게 버텨준 게 동료들에게 큰 힘이 됐을 거다. 엘리안이 다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정말 궁금하다.
앞으로 한국전력에서 맡게 될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일단 포지션이 아웃사이드 히터기 때문에 전부 다 잘해야 한다(웃음). 공격과 수비 어디에서도 구멍이 나선 안 된다. 원래 둘 다 해야 하는 자리기도 하고,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공수 균형이 어느 정도 잡혀 있다는 점으로 가치를 어필하는 선수 아닌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서브로 상대 리시브를 강하게 흔들고, 수비에서는 최대한 버텨주는 쪽으로 가고자 한다.
이번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최대어’ 에반스와 함께하게 됐다.
일본 리그 하이라이트를 통해 에반스가 뛴 경기 영상을 봤다. 일단 높이가 있지 않나. 블로킹에서 든든하게 한 자리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공격적인 부분에서는 정말 힘 있게 스파이크를 때린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았다. 신체 능력뿐 아니라 움직임도 좋더라. 같은 선수지만 나 또한 에반스와 함께 뛰면 어떨지 굉장히 기대되고 궁금하다. 빨리 팀에 합류했으면 좋겠다(웃음). 무엇보다 에반스가 일본에서도 뛰었기 때문에 아시아배구에 대한 이해도도 높을 거다. 비교적 수월하게 V-리그에 적응하지 않을까.
아시아 쿼터 공격수 에디와 재회하게 됐는데.
그것도 삼성화재가 아닌 한국전력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웃음). 삼성화재 시절을 되돌아보면 에디는 무엇보다 정말 성실한 선수였다. 열심히 운동하고, 아주 착하다(웃음). 같은 포지션이지만 경쟁자라기보다는 서로 열심히 노력해서 같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우린 결국 선수 개인이 아니라 한국전력이라는 팀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아닌가.
팀에 윤하준 등 유망한 선수들이 많다.
(박)승수도 내가 보기엔 기본기가 정말 잘 갖춰진 선수다. 앞으로가 기대된다. 그리고 (윤)하준이의 경우, 상대 팀으로 경기를 치렀을 때 ‘배포가 정말 큰 선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트에서 느껴지는 깡다구가 장난 아니다(웃음). 내가 신인이었을 때와 비교하면 하준이는 정말 대범한 플레이를 하더라. 그래서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서로 얘기도 좀 나눠봤나) 다른 팀일 때는 그럴 기회가 없었고, 이번에 처음 같은 팀으로 뛰게 돼서 먼저 말을 걸어봤다. 얘기를 좀 해보니 경기장 밖에서는 생각보다 수줍음도 많고 선배와 대화하는 걸 부끄러워하더라. ‘지킬 앤 하이드’가 따로 없다(웃음).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결국 자신감이 플레이에 절반 이상 영향을 준다고 본다. 승수와 하준이도 그렇고, (구)교혁이와 (김)주영이 등 다들 후배지만 이미 멋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본다(웃음). 앞으로 충분히 대성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
한국전력에서 꼭 한 번 같이 뛰어 보고 싶었던 선수가 있었다면.
당연히 영석이 형과 재덕이 형이다. 영석이 형은 상대 팀으로 만나면 블로킹도 블로킹이지만 속공이 정말 신경 쓰이더라. 이제 같은 팀이 돼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웃음). 한국전력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재덕이 형은 기교파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왼손잡이라서 다른 오른손잡이 선수들과 달리 코스나 각에 차이가 있기도 하고, 공을 감아서 때리지 않는 것도 정말 신기했다. 약간 비껴서 때린다고 해야 하나. 재덕이 형만의 시그니처 기술이다. 공의 회전이 다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선수들보다 재덕이 형이 때린 공을 받기가 더 까다로웠다. 게다가 기본기도 좋고, 포지션도 다양하게 볼 수 있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터인 (하)승우 형도 곧 군 전역 후 팀에 복귀한다. 기대된다. 승우 형의 토스를 얼른 한번 받아보고 싶다. 승우 형 서브도 좋다.
이적 후 첫 시즌 목표는.
당연히 봄 배구 진출 아니겠나(웃음).
KB손해보험 이적 후 삼성화재만 만나면 유독 잘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내가 삼성화재 출신이다 보니 KB손해보험에서 뛸 때 삼성화재 스타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막히기도 잘 막혔지만 뚫기도 잘 뚫었다(웃음). (한국전력에서도 삼성화재 킬러가 될까) KB손해보험 시절에 이어 친정팀인 삼성화재를 또다시 적으로 마주하게 됐다. 재미있을 것 같다. 몸담았던 팀이라 해도 봐주는 건 없다. 당연히 한국전력이 삼성화재와 맞대결에서 이기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잘 분석하고 끈질기게 괴롭히겠다(웃음). (또 다른 친정팀인 KB손해보험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지난 시즌만 놓고 보면 리그 최고 수준의 서브를 갖춘 팀이다. 블로킹 시스템도 정말 잘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짜임새가 아주 탄탄한 팀이기 때문에 다가올 시즌에도 강력한 우승 후보가 아닐까. 세터인 (황)택의 형이 일단 중앙을 묶어 놓고 시작하는 게 가장 큰 무기다. KB손해보험 서버들은 야구로 치면 거를 타선이 없는 느낌이다. 모두가 4번 타자다.
‘슈퍼스타’ 김정호, 김포공항서
계약서 도장 찍은 사연은?
늦었지만 쌍둥이 아빠가 된 걸 축하한다.
시즌 일정을 마치고 휴가 기간에 아이들을 봤는데 아내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동안 어떻게 혼자서 아이 둘을 봤는지. 이래서 세상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이 있나 보다(웃음). 아내가 출산 후 육아를 하는 동안에 혼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별말 안 하고 내가 푹 쉴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정말 큰 고마움을 느낀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중 누굴 더 닮았나) 아이들이 아내를 많이 닮았는지 너무 순하다(웃음).
이번 FA를 통해 V-리그 고연봉자 반열에 올랐다.
일단 아이들 분유비는 해결했다(웃음).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는 건 그만큼 한국전력에서 나를 잘 봐줬다는 뜻일 거다. 큰 감사함을 느낀다. 선수답게 경기력으로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쌍둥이 아빠라는 의미에서 등번호 22번은 어떤지) 사실 나도 그동안 써 온 10번 말고 이번에는 한 번 다른 등번호를 달아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가 10번이 좋다고, 그대로 갔으면 좋겠다는데 어떡하나(웃음). 마침 한국전력에 10번이 비어있어서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비시즌 휴가는 어떻게 보냈나.
다음 주면 아이들이 태어난 지 만 1년이 된다(5월 23일). 첫돌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이제 조금은 커서, 지난 시즌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온 가족이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새삼 쌍둥이의 아빠가 됐다는 사실이 느껴지더라(웃음). (계약서 도장을 공항에서 찍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다. 여행을 다녀온 뒤 사인하겠다고 구단에 먼저 말씀드렸었는데, 사무국장님이 직접 김포공항까지 나오셨더라. (웬만한 슈퍼스타들도 경험하기 어렵다는 ‘공항 계약’을 체결한 셈이다) 감사하기도 하고 일단 너무 죄송했다. 공항까지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다. 괜히 나오시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쓰였다. 내가 뭐라고 구단에서 이렇게까지(웃음). 앞으로 더더욱 잘해야겠다.
쌍둥이 아빠로서 육아와 배구 중 무엇이 더 힘든가.
세상 모든 아빠라면 고민도 안 하고 다 똑같이 대답할 거다. 당연히 100% 육아다. 운동할 때와는 또 다른 체력이 필요하다. 다시 봐도, 다시 생각해 봐도 아내가 정말 대단하다.
비시즌 훈련은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
지난주 목요일(5월 1일)부터 팀 훈련을 시작했다. 그때 한국전력 선수들과도 첫인사를 나눴다. 일단 선수들 모두 착하고 인상들이 밝더라. 팀 분위기도 인상적일 만큼 좋았다. 그리고 직접 와 보니 팀에 어린 선수들이 많다는 게 밖에서 볼 때보다도 더 많이 체감됐다(웃음). 그래서 내가 선수단 사이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연차 때와 비교해 기복이 크게 줄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험의 차이라고 본다. 팀 연습도, 개인 연습도 모두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실전이 가장 중요하다. 기복을 줄이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선 마음속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코트 안에서 제 기량을 못 보이고 자기 걸 제대로 할 수 없다. 두려움은 내리고 자신감은 올려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정을 꾸린 게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선수로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없던 책임감도 생긴다. ‘분유 버프’가 진짜로 있다(웃음). (아빠 김정호로서 목표는) 나중에 아이들이 TV 중계에 잡힌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에게 아빠가 배구 선수라고 자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웃음). 그러려면 일단 부상 없이 오래오래 뛰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선수 김정호’의 모습을 언젠간 꼭 보여주고 싶다. 내게는 큰 동기부여다.
단신을 극복할 수 있었던 자신만의 비결도 궁금하다.
일단 높이는 말 그대로 타고난 신체조건이다. 키가 큰 선수들, 나로서는 당연히 부럽다(웃음). 사람마다 분명히 높이에서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블로킹 자리와 수비가 빠지는 코스를 빨리 파악하는 게 내가 갖고 있는 나름의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웃음). (후배 단신 선수들에게 조언한다면) 자신의 장점이 팀에 플러스가 되도록 잘 맞춰야 할 거 같다. 내 경우에는 삼성화재에서 처음 뛰었을 때 블로킹 타이밍이 늦는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래서 KB손해보험으로 이적했다가 다시 삼성화재로 왔을 때는 블로킹을 좀 더 과감하게 시도했다. 공격할 때 상대 블로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좀 나아졌다는 평가를 들었다. 같은 능력치라도 자신이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같은 후회 반복하지 않겠다”
김정호가 외치는 ‘우승 찬가’
나이를 고려했을 때 한국전력에서 최전성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선수로서 최종 목표는.
2022-23시즌 KB손해보험에서 뛸 당시를 되돌아보면 정말 두려웠다. 코트에서 말이다. 특히 봄 배구 무대에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부담도 컸고. 대한항공과 챔피언결정전을 다시 떠올리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경험의 차이와 실력 부족, 여기서 시리즈 승부가 갈렸다고 본다. 배구는 정말 혼자서 풀어갈 수 없는 종목이라고 본다. 당시 케이타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한 것 같다. 내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케이타가 짊어진 짐을 해소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수비 하나와 공격 하나, 그걸 못해 줬다. 케이타를 못 도와준 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 자신도 너무 아쉽다. 그때 후회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케이타에게도 그렇고 당시 KB손해보험 동료들에게도 그렇고, 준우승에 그친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 물론 의미 없는 핑계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진 않다는 거다. 내게 다시 우승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 내 손으로 붙잡겠다.
당장 대표팀에 뽑혀도 손색없을 실력이다.
지난해 부상으로 낙마한 (정)지석 형을 대신해 한 번 뽑히긴 했었다. 상황상 당시에는 솔직히 대체 훈련 파트너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라미레스 감독님이 대표팀에서 정말 잘 대해주셨다. 감독님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너는 언제든 대표팀에 선발돼 뛸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고 따뜻하게 얘기해 주셨다. 그때 대표팀에 선발돼서 약 2주 정도 있었는데, 아내 출산 일정이 앞당겨지는 등 여러 이유로 라미레스 감독을 비롯해 대표팀 선수단과 오래 함께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라미레스 감독의 훈련 방법이나 스타일이 기존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건 확실히 느꼈다. 그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보고 배운 게 많았다. (다시 승선하고 싶은 생각은) 선수라면 누구나(웃음). 진천선수촌에서 함께 운동하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내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앞으로 태극마크를 달 기회가 또 생긴다면 단신 아웃사이드 히터도 대표팀에서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
지난 시즌 데뷔 후 첫 올스타전 출전의 기회가 안타까운 이유로 무산됐다.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로 올스타전 자체가 취소됐다. 출전 불발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훨씬 앞섰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 거다. 조심스레 개인적인 얘기를 좀 더 이어 나가자면,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는다는 발표를 듣기 전까지는 솔직히 ‘올스타전에서 어떤 모습을 선보여야 하나?’ 하는 걱정이 컸다. 사실 내가 춤에는 영 소질이 없다(웃음). 그래서 올스타전 명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기쁜 걸 떠나 그런 걱정들이 더 앞섰다. 만약 다음 시즌 올스타전에 다시 한번 선발된다면 그때는 없는 춤 실력까지 모두 긁어모아서 열심히 세리머니를 해보겠다.
임성진의 빈자리를 메우는 정도로는 스스로 만족이 안 될 듯한데.
성진이가 KB손해보험으로 떠나면서 내가 한국전력 유니폼을 입게 된 건 맞다. 성진이와 나중에 코트에서 만나면 묘한 자존심 대결이 펼쳐지지 않을까(웃음). 이번 FA 시장의 ‘최대어’였던 성진이의 빈자리를 100% 이상으로 채워서 한국전력이 나를 잘 뽑았다는 말을 듣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확실히 있다. 그게 또 나를 불러준 구단에 대한 도리 아니겠나. 나도 나지만 성진이 역시 KB손해보험에서 분명 더 잘할 거라고 본다. 그 팀에는 택의 형도 있고, 경복이 형도 있고, 야쿱도 있어서 아마 성진이도 플레이하기 한결 수월할 거다. ‘에이스 밭’이기 때문에 일단 심리적으로 부담이 훨씬 덜할 거다. 성진이와 나 모두 새로운 팀에서 적응을 잘해 서로 잘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 나와 성진이보다도 더 양 팀의 경기를 기다릴 사람이 있다. 민수 형이 KB손해보험을 상대로 아주 잘하지 않을까(웃음).
한국전력이 이번 FA 시장의 ‘숨은 승자’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김정호라는 선수가 그 중심에 서 있는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전력을 다시 봄 배구로 이끄는 게 가장 큰 목표다. 팬분들이 수원체육관에 많이 찾아와 주셨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배구 보여드릴 자신 있다. 팀에 새로 합류한 나와 민수 형도 많이 사랑해 달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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