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걸음질 치는 한국배구의 예고된 참사, 이래도 수수방관만 할 것인가
- 국제대회 / 이보미 / 2023-09-23 15:41:28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방향마저 잃었다.
한국 남자배구는 일본, 중국과 함께 아시아 강호로 꼽혔다. 이란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판도를 흔들었다. 2014, 2018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모두 이란의 것이었다. 카타르도 2006년과 2018년 아시안게임 4위를 차지하며 호시탐탐 아시아 정상을 노렸다.
아시아선수권에서도 2011년 이란이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일본과 나란히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다. 2023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일본이 이란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위는 카타르, 4위는 중국이다. 한국은 6강에서 주축 멤버들이 빠진 중국에 발목이 잡히면서 최종 5위를 기록했다.
2018년 이후 5년 사이에 아시아배구가 급변했다. 국제배구연맹(FIVB) 세계랭킹에서도 일본(5위), 이란(11위), 카타르(17위)에 이어 한국은 아시아 4번째인 27위로 밀려났다. 이 자리도 위협받고 있다.
올해 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3위 쾌거를 달성하며 세계 정상급 전력을 드러낸 일본과 그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도 아닌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한국에 이어 중국(29위), 호주(35위), 대만(43위), 파키스탄(51위), 인도네시아(57위) 등이 차례대로 랭크됐다. 하지만 최근 세계랭킹 밖에 있었던 태국(71위), 인도(73위), 바레인(74위)까지 아시아 남자배구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태국은 올해 박기원 감독의 손을 잡고 아시아배구연맹(AVC) 챌린지컵 깜짝 우승을 거뒀다. 파키스탄도 올해 브라질 출신의 라미레스 페라즈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새 출발을 했다. 이 감독은 1983년생으로 2021년부터 2023년까지는 바레인 남자배구대표팀을 맡기도 했다.
인도 배구 시장도 커지고 있다. 2019년 시작된 ‘PVL(Pro Volleyball League)’는 2022년 프라임 리그로 새 출발을 했고, 남자배구 8개 팀이 각축을 벌였다. 더 놀라운 점은 FIVB의 발리볼월드 중계를 통해 프라임 리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발리볼월드와 다년간 파트너십을 맺었다.
중국도 최근 남자배구, 여자배구 모두 적극적인 해외 교류로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선수들의 해외 진출에도 보수적이었던 중국이 확 바뀌었다. 대표팀 핵심 멤버들은 유럽 리그에서 뛰고 있다.
아시안게임 직전 만난 베테랑 세터 한선수는 “다른 아시아 팀들이 많이 성장했다. 직접 경기를 해봐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팀들이 엄청나게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럽 등 해외 지도자들이 이 팀들을 성장시킨 것 같다”면서 “한국도 세계적인 배구에 맞게끔 많이 성장을 해야 한다. 선수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하고, 협회나 지도자 등 모든 구성원들이 여기에 몰두해서 깊게 생각해야 한다”며 소신 발언을 남긴 바 있다.
일본은 탄탄한 인프라를 토대로 세계 강호들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췄다. “제대로 된 세터 1명 키우기 힘들다”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저 정도 실력의 세터는 흔하다”고 할 정도다. 동시에 약점인 높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훈련을 한다.
한국배구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이제 배구 저변 확대를 위한 유소년 배구 활성화가 시작된 단계다.
엘리트 학교팀과 선수 규모 자체가 준 것도 맞지만, 이 소수의 선수들마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힘겹게 프로 관문을 통과한 뒤에는 베테랑 선수들과의 경쟁력에서 밀리며 웜업존을 지키기 일쑤였다. 코트 위에서 뛸 수 있는 기회마저 잃고 프로 무대에서 사라진 선수들이 즐비하다.
프로에서는 “신인 선수들을 뽑으면 기본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훈련을 잘 맞춰서 끌어 올렸는데 휴가를 다녀오고 나면 다시 제로가 된다. 기본기가 없어서 그렇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유소년부터 시작되는 일원화된 그리고 체계화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아마추어 현장에서는 “학교 수업 일수를 지켜야 해서 훈련에 애를 먹고 있다”, “어린 선수들이 기본기와 같은 힘든 훈련을 기피한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제점은 인지하고 있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는 올해 들어 학생선수들의 출석 인정 일수(결석 허용 일수)를 대폭 늘렸다.
프로에 새로 유입된 선수들의 수가 현저히 낮아지면서 코트에 남아 있는 선수들의 몸값만 올랐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V-리그 내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나온 결과물이다. 이를 탓할 수만은 없다. 각 팀에서는 그만큼 투자를 하는 셈이다. 아울러 해외 감독, 선수들 모두 한국의 클럽하우스의 최첨단 시설, 리그 운영, 팬들의 관심 등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선수들이 오로지 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 문제다. 그 막대한 관심과 투자가 국제 경쟁력 제고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V-리그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이 때문에 단기, 중기, 장기적 전략과 로드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프랑스 등에서는 어린 선수들로만 팀을 꾸려 자국 리그에 참가하게 만들었다. 프로팀에서는 외국인 선수, 베테랑 선수들에게 밀려 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선수들이 경험을 쌓고 성장한다면 대표팀의 자원이 될 것은 분명하다.
또 유럽 클럽팀들은 리그 뿐만 아니라. 컵대회, 유럽배구연맹(CEV) 대회 등 유럽 내에서도 지속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팀당 외국인 선수가 5명이 넘어도 경기 수가 많기에 로테이션을 돌린다. 그렇게 비주전 멤버들이 출전 기회를 얻는다. 아시아 내에서도 동남아시안게임(SEA게임), 아시아클럽선수권대회 등을 통해 꾸준히 해외팀들과 만날 기회가 있다. 새로운 팀, 새로운 선수들을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얻는 것은 크다.
한국배구는 국내에만 머물러있다. 국제대회 경기를 보면 모든 면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다. 팀 색깔이 없다. 수비, 스피드, 블로킹, 공격, 조직력까지 모두 밀린다. 남자배구도, 여자배구도 중앙 공략을 집중적으로 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만한 무기가 없다는 것이 패배의 원인이다. 아울러 상대팀의 새로운 플레이나 변칙에 빠르게 대응을 못하는 점도 눈에 띈다.
연령별 대표팀의 국제대회 출전 기회도 버리면 안된다. U18, U19, U20, U21, U23 대표팀까지 각급 연령별 대표팀의 연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선수 뿐만 아니라 지도자 육성까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V-리그는 올해 아시아쿼터를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신선한 변화는 긍정적이다. 다만 국내 선수들이 뛸 기회는 더 줄었다. 이에 대한 대책 마련 없이 외국인 선수가 2명이 뛰는 상황이기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2023년 남자배구는 인도, 파키스탄에 패했고, 여자배구는 베트남, 카자흐스탄에 졌다. 이제 V-리그 여자배구 신인 선수 롤모델 중 한 명이 태국의 찻추온 목스리일 정도다. 태국 여자배구는 아직까지 올림픽 본선 무대도 밟지 못했지만,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그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배구가 뒤쳐져 있다. 김연경 은퇴 이후의 대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도쿄올림픽 4강 기적 2년 만에 추락했다.
작년 한국에서 열린 해외 우수배구 지도자 초청 기술 세미나에서 이탈리아의 바르볼리니 감독은 한국 여자배구에 대해 “김연경이 빠지면서 세대교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김연경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좀 더 천천히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고, 프랑스 남자배구대표팀과 도쿄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로랑 틸리 감독도 “2012년 프랑스 대표팀을 맡아 올림픽 금메달까지 9년이나 걸렸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사태 심각성을 인지했지만 아무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2023년 충격은 꽤 컸다.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사진_A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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