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FIVB의 바뀐 귀화 선수 규정과 한국 대표팀의 선택지
- 국제대회 / 김종건 / 2023-07-24 08:44:00
튀르키예가 2023 VNL 여자부 우승을 차지했다.
2년 전 도쿄올림픽 8강전에서 한국 대표팀에 패하며 눈물을 흘렸던 그 팀이 2년 만에 세계 정상에 섰다. 우승 덕분에 FIVB 세계랭킹도 1위로 올라섰다. 반대로 올림픽 이후 우리 여자대표팀은 VNL에서만 24연패를 했고 세계랭킹도 3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지난 2년간 튀르키예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두 가지 선택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우선 새로운 사령탑 선정이다. 그동안 오랫동안 팀을 이끌어왔던 지오반니 구이데티 감독과 결별하고 요즘 가장 뜨거운 다니엘레 산타렐리 감독을 영입했다. 2022년 세르비아 대표팀을 이끌고 VNL에서 3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젊은 감독은 새 팀에 부임하자마자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우리 매스컴은 외국인 감독이 V-리그에 올 때마다 무턱대고 명장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는데, 이 정도의 성과를 내야 그런 칭호를 해줘도 아깝지 않다.
튀르키예는 지난 2월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자국 리그 일정이 모두 연기됐다. 대표팀 선수들의 소집도 뒤로 미뤄졌지만, 새 감독은 단시간에 이 선수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배구 감독의 역할은 다른 어느 종목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구단들은 반대다. 선수가 좋으면 감독은 누가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토종 감독들의 역량을 대중이 높게 평가하지 않는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인식을 심어준 토종 지도자들도 반성할 부분은 있지만, 국적을 떠나 3류 감독은 팀을 말아먹고 1류 감독은 팀에 오래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혹시라도 외국인 감독을 쓰길 원하는 팀이 있다면, 싼 맛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만만한 사람을 찾지 말고 까탈스럽더라도 능력이 있는 고급 인력을 찾기를 권한다. 일본 남자배구도 프랑스의 필립 블랑 감독을 영입한 성과를 이번 VNL 3위로 확인했다. 좋은 외국인 지도자를 데려와 현명하게 쓰면 그 나라의 배구는 드라마틱하게 달라진다.
튀르키예의 2번째 변화는 대표팀에 새로 들어온 멜리사 바르가스다.
튀르키예 대표팀으로 데뷔전을 치른 바르가스는 우리 대표팀과의 VNL 첫 경기에서 상상 이상의 파괴력과 강력한 서브를 구사했다. 블로킹 위에서 때리는 공격의 타점과 남자 선수를 연상시키는 스파이크 스피드는 우리 선수들과 확연히 비교됐다. 그날 바르가스는 1,2세트만 선발로 뛰면서 팀내 최다인 15득점을 기록했다. 21차례의 공격에서 13득점을 만들어냈다. 공격효율은 32.35%였다.
바르가스는 쿠바 국적으로 2014년 FIVB 세계선수권 때 쿠바대표팀 소속으로 뛰었다.
2015-2016시즌부터 유럽 리그에서 활동무대를 옮겼다. 전 세계 배구 시장에 많은 선수를 꾸준히 공급해온 쿠바는 정치적인 문제로 자국 선수를 제대로 품지 못한다. 선수들은 부와 명예를 위해 망명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찾아서 쿠바를 벗어나 활동한다. V-리그에서 오래 활동 중인 레오 레이바(OK금융그룹)도 청소년 대표 시절 망명을 선택했다. 쿠바 출신이지만 다른 나라의 유니폼을 입은 가장 대표적인 선수가 폴란드의 윌프레도 레온이다. FIVB는 쿠바의 독특한 상황을 고려해 쿠바 선수의 국적변경을 알면서도 눈감아준 측면도 있다. 튀르키예도 이런 상황을 이용해 바르가스의 귀화를 추진했다.
귀화를 선택하는 나라에서 2년을 반드시 거주해야 한다는 FIVB의 규정을 지킨 바르가스는 결국 튀르키예 배구협회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이번 VNL MVP에 뽑혔다. 산타렐리 감독은 바르가스와 에브라르 카라쿠르트 등 2명의 정상급 공격수를 모두 한 코트에 두는 용감한 전술로 우승까지 내달렸다. 리시브 불안은 감수하면서 팀의 장점인 공격을 극대화해서 이기겠다는 발상의 전환은 통했다. 우리 대표팀은 리시브가 불안할 경우 어떻게 점수를 낼지 고민하는데 이런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당사자 선수들과 대화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해낸 감독의 설득 능력과 비전이 부럽다.
지금 국제배구계는 국적의 의미가 퇴색한 지 오래다. 이탈리아 여자대표팀은 아프리카 혈통의 파올라 에고뉴를 보유한 덕분에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도 이번 VNL 여자대표팀에 피부색이 다른 선수들이 있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경쟁적으로 기량이 좋은 타국의 유망주에게 자국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히려고 한다. 한 명의 여자 유망주를 놓고 이탈리아와 러시아가 법적 분쟁을 벌이는 사례도 있다. V-리그에서 2시즌 동안 인상적인 활약을 했던 노우모리 케이타(말리 국적)가 KB손해보험을 떠나 이탈리아 리그로 간 것도 결국 이런 이유였다. 이탈리아 배구 협회는 그의 가족에게 영주권 등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지금 우리 남자대표팀에 케이타가 있다면 다가올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물론이고 VNL 복귀 여부 걱정은 줄어들 것이다. 배구의 특성상 가장 확실한 득점원이 존재하면 다른 부분의 약점은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다. V-리그 대부분 팀이 외국인 선수에게 공을 몰아주는 이유다. 누구는 이를 몰빵 배구라고 폄훼하지만, 토종 선수들이 그 역할을 못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기려고 이 방법을 택한다. 우리도 가장 쉽고 빠르게 대표팀의 전력을 올리고 싶다면 이런 방법도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두면 된다. 물론 문을 열기 전에 토종 선수 보호와 혈통을 유난히 따지는 대중의 생각이 어떤지도 미리 들어봐야 한다.
이런 가운데 최근 FIVB에서 국가대표 선수의 국적 변경에 큰 영향을 줄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다. FIVB는 7월 6일 대표 선수 귀화와 관련해 기존보다 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기로 했다. 9월 21일부터 발효되는 새 규정에 따르면 국적을 변경할 경우, 경과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1년 더 늘렸다. 또 하나 더 엄격해진 규정 변경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성인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한 선수의 이적 금지 조항이다.
FIVB의 규정 변경으로 지금 당장 눈길을 끄는 선수와 국가가 있다. 일본이 귀화를 추진하는 필리핀 국적의 자자 산티아고다. 신장 195cm의 장신 미들블로커인 그는 일본 V리그에서 오래 활동하며 일본인 대표팀 코치와 결혼까지 하는 등 이미 귀화를 마쳤다. 그런데 산티아고는 5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렸던 SEA게임 때 필리핀 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대표팀 국적 변경의 걸림돌이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다. FIVB는 우회로로 당사국끼리 돈을 주고 선수를 데려오는 길도 열어뒀다. 프로팀처럼 국가 간에 선수를 사고파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일정 액수를 냈지만, 이제는 두 배구 협회의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변경했다.
지금 우리는 점점 더 배구를 하겠다는 유망주가 줄어들어 1년에 100명의 선수도 배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한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이 우리 배구계의 허약한 선수 공급 생태계를 직시하고 보다 생산적인 방안을 찾았으면 한다. 과연 대한민국 배구계와 팬들은 지금 대표 선수들의 국적과 관련해 어떤 생각일까. 만일 팬들이 대표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우리도 해외의 핏줄들에게 문을 열자고 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방법은 많다. 가까운 일본 중국에서 한국인 혈통의 선수를 찾고 미국 NCAA를 뒤져서 조금이라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유망주들을 데려와 육성하거나 국내에 거주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우리 선수로 받아들이는 방법까지 길은 많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길 권한다.
사진 FIVB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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