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봇물이 터진 외국인 감독 영입 바람의 이면

여자프로배구 / 김종건 / 2023-03-27 07: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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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배구 원하는 팬의 요구와 아직 긁지 않은 복권에 눈을 돌린 오너 구단주들

219GS칼텍스-흥국생명의 5라운드가 벌어진 장충체육관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나왔다.

전날 한국 땅을 밟은 흥국생명의 새 사령탑 마르첼로 아분단자 감독이 관중석에서 코트로 내려가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였다. 많은 관중이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홈팀 원정팀 팬을 가리지 않았다. 아직 V-리그 데뷔전을 치르지도 않은 감독에게 보내는 성원과 기대감이 대단했다. 이후 그에게 쏟아진 매스컴의 관심과 흥국생명 팬들의 응원은 뜨거웠다. 요즘 V-리그 어느 감독도 누리지 못할 호사를 누리는 아분단자 감독은 세계 최고의 팬이라고 했다.

 

V-리그 지도자 시장에서 막혔던 빗장이 열렸다. 외국인 감독이 몰려오는 중이다. 이미 대한항공은 2명의 외국인 감독(로베르토 산틸리, 토미 틸리카이넨)을 영입해 2번의 통합 우승을 달성했고 이번 시즌도 통합 우승을 노리고 있다. 흥국생명은 시즌 7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아분단자 감독과 정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통산 4번째 통합 우승을 노린다. 상대는 도로공사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외국인 감독 영입은 모두 성공했다. 페퍼저축은행도 여자배구 지도자만 30년 넘게 한 창단 감독이 시즌 도중에 물러나고 30대 한국계 미국인 대학 감독(아헨 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외국인 감독 영입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4년간 팀을 이끌었던 석진욱 감독과 결별한 OK금융그룹도 물밑에서 움직이는 중이다. 러시아 국적의 감독 얘기가 나돌더니 최근에는 일본 V-리그 파나소닉을 지휘하는 로랑 틸리 감독이 등장했다. 그는 지난해 6KOVO(한국배구연맹)가 주관했던 해외 우수 지도자 초청 기술 세미나로 우리 배구인과 팬에게도 익숙하다. 당시 코로나19에 감염돼 방한하지 못하고 온라인 강의를 했다. 소문대로 OK금융그룹이 영입에 성공한다면, V-리그의 위상은 국제배구계에서 더 높아질 것이다. 그는 2020도쿄올림픽에서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고 금메달을 따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명장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에 앞서 KVA(대한배구협회)2019년부터 여자대표팀 사령탑으로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선임해 2020도쿄올림픽 4강을 달성했다. 2022년부터는 튀르키예리그 바키프방크의 전력분석 담당 세자르 에르난데스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동안 많은 팬은 토종 지도자들의 연구 능력 부족과 낡은 지도방식에 불만을 표시하며 외국인 감독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했다. 이들은 국제 배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갈라파고스 증후군에 빠진 우리의 배구에 실망하며 해결책으로 외국인 감독을 요구한다. 특히 여자부에서 이런 목소리가 더 크다.

 


물론 토종 감독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리그의 기량이 떨어진 것은, 프로 지도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배구 유망주 절대 숫자가 부족하고 어릴 때부터 제대로 기본기를 다지지 않은 선수들의 역량이 떨어진 탓이라고 항변한다. 아무리 감독의 능력이 좋아도 약팀을 하루아침에 강팀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 여자대표팀이 올림픽 4강 다음 해에 국제 대회에서 참패당한 것을 증거로 댄다.

 

팬들은 토종 감독들의 이런 주장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이들에게는 토종 감독=무능하고 선수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집단이라는 확증편향만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KGC인삼공사다. 이영택 감독 이후 새 사령탑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구단이 접촉했던 외국인 감독 영입 대신에 토종 감독을 선택하자 팬들은 반발했다. 이들은 청문회를 요구했다. 구단이 요구를 들어주자 이들은 시즌 뒤 4위를 한 감독의 교체를 요구하며 트럭 시위를 하고 있다. 퇴진 주장은 다수 팬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모양새지만 구단은 고민하는 눈치다.

 

 

이런 가운데 319일 벌어졌던 흥국생명-현대건설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의미심장했다.

이미 정규 리그 1, 2위를 확정한 두 팀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경기였는데 흥국생명 비주전 선수들이 보여준 경기력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웜업존에 있던 선수들 가운데 박현주와 김다은 정윤주가 17개의 후위 공격을 성공했다. 41차례를 시도해 공격성공률은 41%였다. V-리그에서 보지 못했던 플레이에 현대건설은 당황했다. 그것도 상대 팀의 비주전 선수들이 이런 플레이를 하자, 충격은 두 배였다. 그동안 많은 감독이 낮고 빠른 공격을 외쳐왔지만 실제로 선수들이 코트에서 보여준 것은, 그 경기가 유일했다.

 

후위 공격이 많아지면 플레이는 입체적으로 된다. 그날 흥국생명의 플레이는 유럽의 리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여자배구가 떨어진 경기력으로 비난을 받는 이유는 공격이 전위에서 대부분 이뤄져 단조롭게 보이고 설상가상 느리기까지 해서다. 세터의 연결마저 부정확해 프로팀의 경기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분단자 감독은 짧은 기간에 새로운 배구를 보여줬다. 선수들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어떤 훈련방식을 쓴 것인지 궁금하다. 또 이런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선수들이 그동안에는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변화를 유도한 요인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

 

 

 

충격은 상대 팀뿐만 아니라 흥국생명 선수들도 받은 모양이다. 지금 새 감독의 엄청난 훈련에 모두 놀라고 있다고 한다. 외국인 감독은 결코 훈련을 느슨하게 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토종 감독과 달리 선수를 향한 편견이 없다. ‘저 선수는 이것을 못 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으니 용감하게 시킨다. 또 단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보려고 한다. 못하는 선수에게도 두루 기회를 주고 잘하는 선수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지도 않는다. 지금 V-리그의 가장 큰 문제는 몇몇 선수들에게 구단과 감독이 휘둘리는 것인데 외국인 감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외국인 감독 영입 바람은 우리 선수들의 아마추어적인 생각과 낮은 직업의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외국인 감독 영입은 팬뿐만 아니라 구단도 원하고 있다. V-리그 19년 동안 많은 감독을 써본 구단은 높은 기대치에 맞는 신선한 감독을 찾는데 힘들어한다. 그만큼 V-리그 지도자 시장의 인력자원이 부족하다. 그런 면에서 외국인 감독은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복권과 같다. 물론 소통의 어려움이 주는 위험변수는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도 요즘 구단들은 용감하게 해보자는 방향으로 점점 바뀌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너 구단주다.

 

 

이런 추세를 KOVO는 환영하는 눈치다. 해외 리그의 유명한 감독이 V-리그에 오면 올수록, 국제 배구계에서 V-리그의 가치는 상승할 것이다. 이는 더 좋은 선수와 지도자들이 V-리그에 관심을 가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이라고 KOVO는 기대하고 있다. 외국인 감독의 영입은 토종 감독들에게 위기다. 그동안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든든한 보호 장벽을 쌓아줬지만, 이제는 아니다. 외국인 선수, 아시아쿼터에 점점 자리를 빼앗기는 선수들처럼 토종 지도자들도 외국인 감독에 맞서 역량을 증명해야 한다.

 

지금은 팬들이 아분단자 감독처럼 많은 기대 속에서 외국인 감독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지만, 성적이 나쁘면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것이다. 팬들은 변덕이 심하다. 구단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감독 모두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V-리그보다 앞서 외국인 지도자를 받아들였던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에서도 그런 사례는 많다. 그런 면에서 지금 불기 시작한 외국인 감독 바람의 끝이 궁금하다. 미풍일지 아니면 태풍일지.

 

사진 KOVO, FI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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