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진리를 확인한 도로공사의 상부상조 배구

여자프로배구 / 김종건 / 2023-04-10 07: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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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경기에 차분했던 감독, 함께한 7년 동안 다진 믿음과 지치지 않는 베테랑 언니들의 헌신

 

역시 배구는 에이스 혼자가 아니라 코트의 6명이 함께 마음을 맞춰서 하는 팀 스포츠였다
4월 6일 새로운 역사를 쓰고 2022-2023시즌 V-리그 대장정을 마친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이 남긴 교훈이었다. 모두가 전력이 앞선 리그 1위 흥국생명의 우승을 점쳤다. 1~2차전을 쉽게 이겼을 때만 해도 챔피언결정전이 너무 쉽게 끝날까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그것은 기우였다.

배구의 신은 전혀 다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3차전 이후 도로공사 선수들의 엄청난 수비 집중력과 실수한 동료를 다독거리면서 침착하게 경기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였다. 김종민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동안 한 박자 늦춰서, 조용한 목소리로 작전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일부러 말을 천천히 쉬어서 했다. 선수들에게 숨 고를 시간도 줬다. 내가 흥분하면 선수들도 급해지고 멘탈이 흔들릴 수 있어서 목소리도 낮췄다”고 털어놓았다. 잘못한 부분이 있어도 혼내지 않았다. 필요한 부분만 얘기하고 용기를 줬다. “얘기 많이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는 감독은 선수들을 믿었고 스스로 경기를 풀어나가게 했다.


 

공교롭게도 네트 반대의 흥국생명은 모두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다혈질의 외국인 감독은 계속 큰 목소리로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범실에 질책도 했다. 어느 선수는 서브 범실 뒤 감독의 지적에 주눅이 든 표정이 역력했다. 이 와중에 외국인 선수는 시리즈 내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경기력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방송 화면에 계속 욕하는 입 모양이 잡히는 또 다른 선수도 있었다. 모두가 웃으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경기를 하는 도로공사와 비교가 됐다.


흥국생명 팬들은 4차전에서 나왔던 외국인 감독의 ‘정신력’ 발언에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타임아웃 때의 지시도 토종 감독들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긴박할수록 상황을 공유하고 같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소통이 중요한데 언어가 다른 외국인 감독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로공사 선수들은 챔피언결정전을 보너스 경기라고 생각했다. 감독부터 그런 얘기를 했다. 먼저 2경기를 패했기에 더 잃을 것도 없었다. 마음이 편한 선수들은 3차전 이후 쏟아지는 관심과 경기가 주는 긴장감을 즐겼다. 흥국생명은 달랐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즐기지도 냉정하지도 못했다. 1, 2차전을 쉽게 이겼기에 경기를 거듭할수록 중압감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우승을 눈앞에 뒀던 3차전 3세트 20-15에서 역전당한 이후부터는 불안 증세가 눈에 띄게 노출됐다. 마음이 흔들린 선수들에게는 전력상 앞선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었다.

0%의 확률을 뒤집은 도로공사는 6명 선수의 합친 마음으로 우승을 빼앗았다.
인천 1,2차전 원정 때는 많은 선수가 감기에 걸려 최악의 몸 상태였다. 2차전을 앞두고 김종민 감독은 주전 선수들을 따로 불렀다. 맛있는 한우를 사줬다. 평소에서 선수들과 자주 회식을 해온 그는 “선수들의 입맛이 없을 것 같아서”라면서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인데 힘내자고 편하게 얘기했다”며 반전의 발판이 됐던 회식 자리를 말했다. 2차전 패배 뒤 모두가 ‘시리즈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반면 김종민 감독은 희망을 봤다고 했다. “2차전 3세트에 경기를 잘해서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기회를 잡으면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그쪽은 체력부담이 있을 것이고 지면 점점 불안해질 것”이라며 이번 시리즈의 분수령을 되짚었다.

 


김종민 감독은 챔피언시리즈 동안 많은 예측과 명언을 남겼다. 그 말은 현실이 됐다. 1, 2차전 뒤 “우리가 챔프전 시작하면서 감기에 걸릴 줄 누가 알았겠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면서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5차전을 앞두고는 “우리가 기록에 남을 수도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결국 도로공사는 기록과 기억을 모두 남겼다.

김종민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우승 뒤 인터뷰에서 도로공사의 진정한 힘을 얘기했다.
“‘우리는 어느 팀에게도 이길 수 있고, 질 수 있는 팀이다. 안 돼도 옆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시즌을 치르자. 나 잘났다 하면 쉽지 않을 것이다. 똘똘 뭉치자’고 했다. 지나고 보니 페퍼저축은행에 2패, 현대건설과 3승 3패를 하고 흥국생명을 이겼다. 누구 한 명이 뛰어나지 않지만, 안에서 6~7명이 뭉치면 단단한 팀이다. 챔피언결정전도 마찬가지였다. 잃을 것이 없었다. 상대가 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선수들이 잘 버텨줬다”고 털어놓았다.

 

 

7년째 도로공사를 지도해온 김종민 감독은 선수들과의 탄탄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끈끈한 팀워크를 만들었다. 도로공사는 경험이 많은 언니를 중심으로 개인의 역량보다는 팀으로 더 큰 힘이 생기는 조직력과 분업의 배구를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식 배구’ ‘선수를 육성하지 못하는 감독’이라고 비난했다. 감독은 “7년간 세터만 바뀌었고 나머지는 거의 그대로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팀을 만들어놨다고 하는데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게 했다. 각자가 그 위치에서 잘하면 더 강해지는 팀이 있다”면서 줏대 있게 밀고 나갔다. 서로가 지지고 볶으면서 7년을 함께 해온 시간과 좋은 추억으로 다져진 팀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확실히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었다. 30~40대 베테랑 언니들은 중심을 잘 잡아줬다. 선수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도와주는 상부상조의 배구는 감동마저 줬다. 김종민 감독은 “나부터 감동을 받았다. 너무 힘들어 보여서 살살 하라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눈빛이 살아 있었다. 경험 많은 선수들이 상대의 리듬과 페이스를 파악하고 운영해 이길 수 있었다”고 했다.

 

 

흥국생명도 베테랑이 큰 역할을 했지만, 이번 시즌 흥국생명에는 오직 한 명만 보였다. 팬도 매스컴도 온통 매일 그의 얘기만 반복했다. 현재 V-리그 최고의 스타이고 흥행의 주역이지만, 너무 지나쳤다. 흥국생명이라는 팀이, V-리그가 오직 한 선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될 정도였다. 물론 그 선수의 잘못은 아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였다. 게다가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힌 극성 팬덤은 시즌 내내 팀 안에서 다른 희생양을 찾았고 계속 남의 탓만 했다. 그들로 인해 상처받은 선수들도 많았다. 팀의 케미스트리마저 걱정될 정도였다.

마르첼로 아분단자 감독도 이번 시즌 흥국생명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았다. “우리는 90%가 김연경 위주로 돌아가는 팀이다. 선수 혼자서는 우승할 수 없다. V-리그의 배구는 과거에 머무른 것 같다. 두 선수로 풀어가는 느낌이다. 배구는 다양한 선수들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번 챔피언결정전은 ‘베테랑 두 명’과 ‘팀으로 뭉친 대단한 언니 다섯 명’의 끝장 대결이었다. 이 가운데 배구의 신은 선수보다는 팀에게 우승이라는 선물을 줬다.

 


요즘 V-리그는 외국인 감독 바람이 거세다. 토종 감독들도 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경험을 쌓아온 전문가지만, 점점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남녀부 챔피언결정전은 토종 감독과 외국인 감독의 맞대결이었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은 ‘자존심’과 ‘태양’으로 이를 언급했다. 토종 감독들은 심정적으로 도로공사를 많이 응원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명장이라던 아본단자 감독을 꺾은 김종민 감독은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외국인 감독은 시스템이 다르다. 큰 선수를 데리고 거기에 맞는 플레이를 한다. 우리는 또 다른 게 있다. 상대가 외국인 감독인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단에서 원하면 쓰는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을 쓰는 게 프로”라고 했다.

외국인 감독이 모든 문제의 해법이라고 믿던 이들에게는 도로공사의 우승이 충격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결과로 얘기한다. 선수는 우승으로 팀에 공헌한다. 외국인 감독을 향한 맹목적인 기대도 토종 감독을 향한 근거 없는 비하도 모두 의미 없다는 것을 김종민 감독은 확인해줬다. 도로공사의 우승으로 외국인 감독도 토종 감독과 같은 기준에서 평가받을 계기는 마련됐다. 국적과 관계없이 좋은 성과를 내는 감독이 명장이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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