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업존에 얽힌 웃픈 이야기, 배구 코트 옆 또다른 코트

매거진 / 이정원 기자 / 2020-12-24 01:48:56

 

웜업존은 경기에 뛰지 않는 선수들이 머무는 곳이다. 혹은 경기에 뛰던 선수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다. 웜업존에서는 수많은 말과 행동들이 나온다. 그 말과 행동은 코트 위에 있는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된다. 누군가는 후보 선수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할지 몰라도, 누군가는 웜업존에 있는 선수들을 분위기 메이커라고 칭한다. 배구 코트 뒤, 옆에 있는 웜업존에서 볼 수 있는 장면과 행동들을 살펴보았다. 

 


우리 팀 분위기 메이커 나야 나

‘분위기’란 말은 경기 전후로 감독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배구는 유독 분위기에 따라 경기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세트 우위를 점했더라도 안심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도 언제 어떻게 분위기가 뒤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엔 세리머니만큼 좋은 것도 없다. 득점 후 포효하거나, 웜업존으로 달려가 선수들과 함께하는 세리머니 역시 코트를 뜨겁게 달군다. 웜업존에 있는 선수들은 본인들끼리 구호를 만들거나, 통일된 동작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로나19로 관중 입장에 제한이 되는 요즘, 육성 응원은 금지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응원도 자제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다소 적막할 수도 있는 경기장에서 팬이 아닌 선수가 응원하는 모습은 새롭고 흥미롭게 다가오는 요소다.


‘잘나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웜업존도 흥겨운 OK금융그룹-KB손해보험


남자부 분위기 메이커하면 떠오르는 선수는 단연 KB손해보험 외국인 선수 노우모리 케이타다.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득점을 통해 본인만의 흥을 끌어올린다. 손바닥으로 본인 얼굴을 스치는 “You Can’t See Me”라는 동작은 아무도 내 앞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You Can’t See Me”는 WWE 프로레슬링 선수 존 시나의 시그니처 동작이다.

KB손해보험 이상렬 감독은 “케이타가 오고 나서 팀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다. 실력도 있지만 경기 외적으로 흥이 넘치는 선수다. 그런 부분이 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수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시즌 한층 만개한 기량으로 팀 승리에 일조하는 김정호는 “어두웠다가도 케이타 덕에 웃음 짓게 된다”라고 말할 정도다.

이 세리머니는 V-리그 남자부 선수들에게 전파되기도 했다. 현대캐피탈 세터 김형진은 1라운드 KB손해보험과 맞대결에서 상대 공격을 블로킹으로 막고 나서 세리머니를 따라했고 그 장면이 중계에 포착됐다.


 

이번 시즌 OK금융그룹으로 새 둥지를 튼 미들블로커 진상헌은 석진욱 감독이 꼽은 팀 내 분위기 메이커다. 13년차 베테랑이지만 코트를 뛰어다니며 분위기를 올리는 것에 앞장서고 있다. 진상헌을 보면 웜업존 선수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속공 혹은 블로킹 득점을 올린 후 웜업존으로 가 선수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동작을 춘다거나, 소리를 지르며 득점의 기쁨을 만끽한다.

석진욱 감독은 이런 모습에 “나한테만큼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웃으며 말한다. 진상헌은 “언젠가 감독님이 받아주시지 않을까”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진상헌과 더불어 송명근, 펠리페 역시 팀에 다채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웜업존 선수들과 거리는 멀어도 코트 위에서 송명근, 펠리페는 기합을 불어 넣으며 코트를 달군다. 특히 송명근은 상대 서브 차례 때 동료들에게 “수비”라고 외치면 웜업존 선수들도 “수비”라고 말한다. 함께 수비 집중력을 가다듬는다. 석 감독은 “보통 외국인 선수가 기합을 넣는 경우는 잘 없다. 근데 펠리페는 한다. 송명근도 항상 기합을 넣는다. 정말 큰 힘이 된다”라며 좋은 분위기의 비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독의 이런 칭찬은 선수들도 춤추게 한다. 송명근은 “펠리페가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라고 말했고, 펠리페는 “팀워크나 이런 부분이 잘 이뤄지고 있다. 선수들과는 좋은 감정을 유지하며 플레이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전력 성적 반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선수가 있다. 바로 미들블로커 안요한이다. 시즌 초반 주전으로 활약하던 안요한은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미들블로커 신영석이 합류한 이후 자연스레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웜업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안요한은 자신의 출전 여부와 별개로 웜업존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팀 득점이 올라갈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팀의 사기를 올리고 코트 위 선수들이 득점을 성공시킨 후 웜업존으로 오면 가장 먼저 다가가 같이 세리머니를 해준다. 이런 선수가 있기에 한국전력이 시즌 초 부진을 딛고 다시 순항하고 있는 게 아닐까.

 


춤추고, 소리 지르고
여자부 웜업존은 왁자지껄


여자부는 남자부보다 웜업존 선수들이 분위기를 띄우는 경우가 많다. 큼지막한 동작들로 코트를 달구는 남자부와 달리 여자부는 아기자기한 행동으로 주전, 백업 선수 구분할 거 없이 다양한 응원문화로 코트가 뜨겁다.

GS칼텍스와 KGC인삼공사의 웜업존은 언제나 왁자지껄하다. 지난 8월 열렸던 2020 제천·MG 새마을금고컵 프로배구대회에서 GS칼텍스 웜업존이 화제가 됐다. 권민지를 중심으로 칼군무를 선보였던 선수들, 음악에 맞춰 펼쳤던 응원 문화에 코트 안 선수들도 탄력을 받았다. 웜업존 응원이 우승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 형성에 선수들이 더욱 힘을 얻었다. 주장 이소영은 “민지가 앞장서서 분위기를 올린다. 민지가 ‘이거 할 거야’라고 하면 모두가 다 따라 한다. 완전 흥부자다”라고 말한다. 또한 유서연은 “(문)지윤이와 민지가 주축이 되어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애들이 ‘뛰어, 뛰어’ 하면 다 같이 뛴다. 즉흥적이다. 재밌는 분위기가 나온다. 2라운드 흥국생명전도 졌지만 분위기가 다운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문지윤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김유리와 이현의 웜업존 응원도 화제를 모은다. 두 선수는 열 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웜업존에서 열띤 응원을 펼치며 GS칼텍스 특유의 즐거운 분위기를 코트 위에 있는 선수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KGC인삼공사도 뒤지지 않는다. 행과 열을 맞춘 응원에 카메라는 자연스레 웜업존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중계진들도 그런 모습을 보며 “저런 응원이 코트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라며 웃었다.

흥국생명은 끼많은 선수들이 즐비한다. 김연경을 비롯해 ‘흥부자’라 불리는 이재영-이다영이 있다. 특히 김연경은 과한 세리머니를 한 나머지 며칠간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과연 흥국생명의 분위기 메이커는 누구일까. 주장 김연경은 리베로 박상미를 뽑았다. 박상미는 평소에도 상당히 흥이 많고 잘 웃는 편이다. 그는 출전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할 때에도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웜업존에서 전파했다. 지금은 도수빈에 이어 흥국생명 제2 리베로로 활약 중이다. 벤치에 앉아 있을 때도 그의 입은 쉬지 않는다. 김연경은 “박상미가 분위기를 밝게 해준다. 파이팅을 잘한다. 캐릭터가 재밌다. 팀 분위기를 살리는 데 힘이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코트에서 뛰지 않지만 쉬는 법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살려야 한다. 코트 위 동료들을 독려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등 기를 불어 넣는다. ‘ONE TEAM’이라는 말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다.


‘웜업존에 있는 게 여전히 어색해’
한때 이름 날렸던 베테랑 선수들


웜업존을 보다 보면 ‘이 선수가 왜 웜업존에 있지?’하는 선수들이 눈에 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량 하락에 어쩔 수 없이 웜업존을 지키는 선수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KB손해보험 윙스파이커 김학민이다. 2019-2020시즌을 앞두고 대한항공에서 KB손해보험으로 넘어온 김학민은 지난 시즌과 달리 올 시즌 출전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 시즌 32경기(118세트)에 출전해 311점, 공격 성공률 49.13%를 기록하며 김정호와 KB손해보험 윙스파이커 라인을 지켰지만 올 시즌에는 상황이 다르다. 올 시즌 2경기(5세트) 출전에 불과하다. 무득점이다. KB손해보험 이상렬 감독은 김정호-김동민 주전 라인에 백업으로는 정동근, 여민수 등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체질 개선을 위한 이상렬 감독의 고민이 반영된 결과다. 이젠 국군체육부대에서 황두연까지 전역해 팀에 가세했다. 출전 기회 얻기가 더욱 힘들 것으로 보인다.

김학민은 2017-2018시즌, 2018-2019시즌에 대한항공 백업 선수로 활약했다. 데뷔 시즌인 2006-2007시즌부터 팀의 주전으로 활약해온 그가 웜업존에 머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지석-곽승석 라인이 대한항공에 첫 우승을 안길 정도로 막강한 공수 실력을 선보이며 팀에 큰 영향력을 선보이자 자연스레 경쟁에서 밀려났다. 웜업존에 머무는 것보다 경기에 뛰고,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팀을 옮겼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삼성화재 왕조의 마지막 멤버 중 한 명인 윙스파이커 고준용도 데뷔 후 가장 적은 출전 시간을 부여받고 있다. 2011-2012시즌에 데뷔한 고준용은 현재 부상 재활 중인 지태환과 함께 현재 삼성화재에 남아 있는 왕조의 주역 중 한 명이다.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진 않더라도 공수에서 살림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난 시즌 팀은 저조했지만 고준용은 묵묵히 자기 역할을 했다. 30경기(85세트)에 출전해 185점, 공격 성공률 53.72%, 리시브 효율 34.27%를 기록했다.

올 시즌에는 고희진 감독의 부임과 함께 출전 시간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변화’를 외치며 팀 리빌딩에 나선 고희진 감독은 미들블로커 박상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고 있다. 박상하를 빼면 모두 20대 초중반의 선수들이 삼성화재 주전으로 뛰고 있다.



현재 고준용의 포지션인 윙스파이커에는 젊고 미래가 창창한 선수들이 많다. 주전으로 활약 중인 황경민, 신장호를 비롯해 2년차 정성규, 신인 김우진-이현승-이하늘, 한국전력에서 트레이드되어 넘어온 김인혁까지 7명의 선수가 경쟁자다.

고준용은 올 시즌 일곱 경기(10세트) 출전에 그쳤다. 만약 이대로 고준용의 출전이 멈춘다면 데뷔 후 최소 경기 출전 기록으로 남게 된다. 고준용의 개인 한 시즌 최소 경기 출전 기록은 데뷔 시즌인 2011-2012시즌 기록한 20경기다(군 전역 후 시즌 중반 합류해 뛴 2017-2018시즌 6경기 제외).

현대건설 ‘꽃사슴’ 아포짓 스파이커 황연주도 최근 몇 시즌 전부터 웜업존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2018-2019시즌부터 점차 출전 시간이 줄어든 황연주는 지난 시즌엔 8경기(15세트) 출전, 26점, 공격 성공률 28.95%로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불과 세 시즌 전인 2017-2018시즌에 30경기(111세트) 378점, 공격 성공률 36.37%를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물론 2020-2021시즌 초반에 선발 출전 기회도 얻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이었다.

황연주의 포지션인 아포짓 스파이커에는 외국인 선수가 주로 뛴다. 공격에만 집중하는 포지션 특성상 국내 선수보다는 파괴력 있는 외국인 선수를 선호하는 게 현실이다. 올 시즌에도 루소가 아포짓 스파이커 자리에서 뛰고 있고, 지난 시즌에도 마야와 헤일리가 황연주의 자리에서 뛰었다.


 


데뷔 시즌부터 2017-2018시즌 때까지만 하더라도 황연주의 왼손 스파이크 공격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점프 높이는 낮아졌고, 자연스레 힘도 떨어졌다. 경기에 못 뛴다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항상 웜업존에서 감독의 출격 명령을 기다리며 몸을 달궈놓는다. 시즌 초반 부진하고 있는 팀 성적에 따라 지난 시즌보다는 출전 기회가 늘어날 수도 있다. 황연주 역시 지난 5월 본지와 인터뷰에서 “남은 선수 생활 동안 주전으로 뛰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코트에 한 번만 들어가더라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겠다. 팀에 도움 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라고 각오를 다진 바 있다.

흥국생명 미들블로커 김나희도 시즌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출전 기회가 줄어들고 있는 선수다. 데뷔 시즌인 2007-2008시즌에 28경기(106세트)에 출전해 170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16-2017시즌까지 굳건히 흥국생명 미들블로커 라인을 지켰다. 2016년엔 김혜진에서 김나희로 개명도 했다.

하지만 2017-2018시즌 김채연, 2018-2019시즌 이주아 등 유망한 신인 미들블로커들이 합류하면서 조금씩 출전 기회를 잃기 시작했다. 또한 2018-2019시즌에는 베테랑 미들블로커 김세영까지 오면서 입지는 더 줄어들었다. 그래도 2018-2019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통합 우승에 일조했다.

2019-2020시즌에는 12경기(24세트)에 출전해 42점을 기록했다. 제한된 상황 속에서 제한된 출전 기회를 받았다. 그리고 2020-2021시즌에는 1경기(1세트) 출전에 그쳤다. 11월 22일 현대건설전 출전이 유일하다. 당시 두 번의 공격, 한 번의 서브를 시도했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김나희는 흥국생명 프랜차이즈 선수다. 경기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리더십과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아 할 정도다. 사교성도 뛰어나다. 김세영, 이주아, 김채연 등이 흔들릴 때 언제든 경기에 뛸 수 있게 몸을 풀며 감독의 명령을 기다리는 김나희다.

글/ 이정원, 강예진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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